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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friday] 월스트리트 누비던 그녀 "내 삶을 한식에 베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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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C 투데이 쇼' 등 해외방송서 한식 알리는 재미교포

교육에 모든걸 건 부모님

피란민 수용소서 자라며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

'타이거 맘' 어머니 아래 학창시절엔 '범생이'였죠

월가 '꿈의 직장'을 버리다

내게 고소득 안겨줬지만 행복을 안겨주진 않더라

모건 스탠리에 사표 내고 뉴욕의 요리학교 들어가

런던·홍콩서 한식당도 운영

통닭은 'Tongdak'으로 써 한식 이름 그대로 살려

방송선 '폭탄주 퍼포먼스' "잊지못할 경험이 중요"

올 초 방영된 미국 유명 토크쇼 '웬디 윌리엄스 쇼'. 출연 셰프가 한국식 닭조림 레시피 설명을 끝내고 맥주잔을 가져왔다. 묘기 부리듯 맥주잔 위에 젓가락을 걸치고 소주잔을 올린다. "자, 이제 따라 해보세요. 소주, 소주, 소주, 밤(bomb· 폭탄)!" 진행자 웬디 윌리엄스가 셰프의 구령에 맞춰 탁자를 두드리자 소주잔이 맥주잔에 퐁당 빠지면서 보드라운 거품이 솟구쳤다. "와우!" 여기저기에서 방청객의 탄성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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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홍콩에 연 한식당 ‘진주’ 주방에서 주디 주가 한국식 닭구이를 마무리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에 다니던 시절 컴퓨터 키보드를 분주히 오갔던 그녀의 손은 이제 도마와 접시 위를 오간다. / 진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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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식 폭탄주 제조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는 런던과 뉴욕을 무대로 한식을 알리는 재미교포 셰프 주디 주(43). "웬디가 폭탄주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분장실까지 가져가서 싹싹 비웠어요. 잊지 못할 경험을 주는 게 저만의 한식 전도법이랍니다." 최근 시장 점검차 한국을 찾은 그녀가 함박웃음 지었다.

주디 주는 지난 2010년 세계적인 인기 요리 경연 프로그램 '아이언 셰프'의 영국판인 '아이언 셰프 UK'에 출연해 스타 셰프로 이름을 알렸다. 미국 NBC '투데이 쇼' '웬디 윌리엄스 쇼' 등 인기 방송에 고정 출연하고, 미국 음식 전문 채널 '푸드 네트워크'에서 'Korean Food Made Simple(한국 음식 간단히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한식을 알리고 있다. 3년 전 런던에 한식당 '진주(Jinjuu·珍珠)'를 열고, 그해 홍콩에도 분점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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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웬디 윌리엄스 쇼’에 출연해 진행자 윌리엄스(오른쪽)에게 닭조림을 설명하고 있는 주디 주. / 웬디 윌리엄스 쇼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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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얀 요리사 가운이 익숙하지만 한때는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뉴욕의 명문 컬럼비아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에서 일하다 진짜 행복을 찾아 요리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한국말은 아기 수준"이라며 영어를 쓰면서도 '맛있겠다' '깻잎' 같은 음식 관련 단어는 또렷한 한국 발음으로 말했다.

―잘나가는 금융인에서 요리사로 인생이 급전환했다.

"90년대 중반 대학을 마치고 모건 스탠리와 골드만 삭스에서 인턴을 했다. 특별한 꿈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땐 금융계가 워낙 각광받던 시절이라 내 또래의 일반적인 코스였다. 이후 모건 스탠리에 정식 입사해 기관채권 파생상품 영업을 담당했다. 아침마다 경제 신문을 들여다보고 온종일 시황표를 들여다봤다. 숫자, 통계에 묻혀 살았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 열정은 사라졌다. 어느 날 보니 녹초가 돼 돌아갔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게 요리책이더라. 음식이 내게 위안과 힐링을 준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안정적인 고소득 직장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겠다.

"시간이야말로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재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좋아하지 않는 것까지 하기엔 너무 짧다. 나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리는 과학에 맞닿아 있었다. 고소득이 담보된 초고속 경쟁 트랙에서 내려와 기꺼이 내 인생을 '다운그레이드'하기로 했다."

―멀쩡한 직장 때려치운다는데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첫 반응은 '우리가 너 공부시키느라 얼마나 돈을 많이 들인 줄 아느냐'는 거였다(웃음). 부모님은 오로지 나와 언니를 좋은 대학에 보내시려고 헌신하셨다. 여느 한인 이민자 가정처럼. 그런 부모님 기준에서 셰프는 용납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이북 출신이신 아버지(79)는 6·25 때 피란와 제주도 피란민 수용소에서 자라셨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치려고 죽기 살기로 공부해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셨고, 60년대 중반 이민 오셨다. 어머니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홀로 유학 왔다가 외삼촌 친구인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여전히 반대하시나.

"아버지가 3년 전 런던에 '진주'를 열었을 때 조용히 말씀하시더라. 어렸을 때 꿈이 부모님이 식당 하는 거였다고. 피란민 수용소에서 겪은 배고픔이 너무 끔찍해서였단다. 아버지는 지금도 밥 한 톨 남기시는 법이 없다. 남은 음식을 보면 옛 기억이 떠올라 고통스러우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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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국말은 아기 수준"이라며 영어를 쓰면서도 '맛있겠다' '깻잎' 같은 음식 관련 단어는 또렷한 한국 발음으로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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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삶을 존경하는가.

"아버지는 병원에서 일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는 전형적인 '타이거 맘(tiger mom)'이었다. 어릴 땐 정말 싫었다. 장난감, 액세서리는 언감생심. 부모님은 1센트라도 아껴 우리를 교육하는 데 썼다. 고등학교 때까지 오로지 공부밖에 모르는 '범생이'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호된 양육법 덕에 반대를 뚫고 꿈을 향해 나가는 불굴의 의지와 자신감을 기를 수 있었다. '타이거 도터(tiger daughter)'가 된 거다(웃음)."

―자신을 'French trained Korean- American Londoner(프랑스 요리를 배운 재미교포 런던 거주자)'라고 소개한 걸 봤다.

"투자은행을 관두고 뉴욕의 요리학교에서 프랑스 파티시에 과정을 마쳤다. 뉴저지에서 태어난 재미교포인데 전 남편 직장 때문에 13년 전 런던으로 갔다."

―프랑스 음식을 배웠는데 결국 한식을 택한 이유는.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엔 한식당은커녕 한국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밥과 된장찌개를 안 먹으면 안 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어머니가 집에서 모든 음식을 만들었다. 꼬마 때 언니랑 내 임무가 마당에 있는 내 키보다 큰 깻잎을 떼는 거였다. 어머니 곁에서 만두도 수백 개씩 빚었다. 참기름 발라 구운 김이 집안 구석구석 쌓여 있었고. 어릴 적 내가 쓰던 목욕통이 어느 순간 김치 버무림용 통이 돼 있더라. 한식은 내 DNA에 있는 음식이다."

―방송에서 한식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식당까지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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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까지 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아요.” 주디 주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금융인에서 셰프로 기꺼이 삶을 ‘다운그레이드’했다”고 말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교포들이 생업 수단으로 '세탁소 아니면 한식당'을 선택하던 시절이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한식당은 지저분하고 주방엔 연기가 가득하고 영어가 안 통하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외국 친구는 물론이고 한국 친구들도 데리고 가고 싶은 한국 밖 한국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

―새로운 도전에 어려움은 없었나.

"런던은 뉴욕과 달라 꽤 애를 먹었다. 한식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 유명 음식 비평가가 우리 음식을 태국 음식과 견줘 혹평하기도 했다. 지금은 자리를 잡았다. 런던 소호점이 '바&레스토랑' 디자인상을 받았고, 미쉐린 가이드에도 리뷰가 실렸다. 박지성 선수도 단골이고, 얼마 전엔 첼시 소속이었던 축구 스타 오스카(현 상하이 상강 소속)가 첼시 선수들과 와서 생일 파티를 열기도 했다."

―운영 철칙이 있다면.

"한국 문화를 보여주되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쿨'한 분위기를 더하는 것이다. 'Tongdak(통닭)' 'Anju(안주)' 'Bo Ssam(보쌈)'식으로 한국 음식 이름을 그대로 살린다. 적어도 고추장·된장·고춧가루·김치 네 단어는 스태프들이 꼭 쓰도록 한다."

―한국어 발음이 어려워 일부러 영어로 풀어 한식을 표기하는 경우도 많은데.

"발음은 쉬운지 몰라도 한식 마케팅하는 데는 마이너스다. 김치를 'Kimchi'라 하지 않고 'fermented cabbage(발효한 배추)'라고 했을 때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인터내셔널한 세상이다. 왜 사람들에게 정확한 단어를 알리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가. 발음 어렵기로 따지면 불어가 더 어렵지 않나. 프랑스 음식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는가?"

―한식 홍보 대사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한식을 알리는 시도도 많은데 조언을 하자면.

"영어 구사자가 많아야 한다. 한식을 영어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절대 글로벌해질 수 없다. 음식을 알리는 건 결국 언어의 몫이다. 미디어 파워도 잊지 마라. 내가 출연한 요리 방송을 보고 한국 여행을 예약했다는 호주 사람도 있다."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는가.

"한번은 시애틀에 사는 재미교포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여덟 살짜리 딸이 핼러윈 파티에 내 분장을 하고 가겠다고 했단다. 눈물이 왈칵 나더라. TV에서 아시아계 여성 롤모델이 워낙 없으니까. 아시아 여성도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미래 세대에 보여주고 싶다."

주디 주 프로필

1974 미국 뉴저지 출생

1993~1997 뉴욕 컬럼비아대 공대

1996~2001 뉴욕 모건 스탠리 근무

2002 뉴욕 슬로 푸드 USA 설립

2003~2004 뉴욕 프랑스 요리학교 FCI

2010 '아이언 셰프(Iron Chef) UK' 출연

2011~ '아이언 셰프 아메리카' 심사위원 출연

2014 한식재단 한식 홍보 대사

2014 런던과 홍콩에 한식당 '진주(Jinjuu)' 오픈

2014·2016 'Korean Food Made Simple' 시즌 1·2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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