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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여행] 외롭지 않다, 쪽빛 바다와 함께 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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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블루 로드’

유난히도 추웠다. ‘시베리아보다 더 춥다’, ‘북극 한파다’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매서운 바람은 두꺼운 외투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이런 추위가 언제였느냐는 듯 영하 20도였던 기온이 며칠 새 영상 10도로 널뛰기하듯 훌쩍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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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 죽도산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산책길을 걷는 여행객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죽도산은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가 빼곡하게 뒤덮고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정상까지 나무데크를 설치해 쉽게 오를 수 있다.


한겨울을 몸서리치게 하는 바람의 변화는 바다에서 더 극적이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매섭게 몰아치던 바닷바람엔 언제부터인지 온기가 담겨 있다. 나른한 봄날의 바람이 던져주는 푸근함은 아직이지만, 따스한 봄의 감촉을 느끼긴 충분하다. 겨울바람에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도 봄기운을 밀어내지 않겠다는 듯 잔잔히 일렁인다. 하루아침에 겨울에서 봄으로 변하진 않는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우리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봄은 그렇게 서서히 다가온다.

빌딩 숲이나 골이 깊은 산은 아무래도 한 박자 늦다. 봄이 오는 데 장애물이 많다. 날이 달라졌음을 느끼기에 바다만 한 곳이 없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기운을 느끼며 봄맞이를 하러 떠나기엔 푸른 바다가 제격이다. 이 시기 가장 입맛을 당기는 제철 음식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대게는 겨우내 살을 불리기 시작해 이맘때는 껍질을 뚫고 나올 정도로 살이 그득하다. 대게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지역은 경북 영덕이다. 맛있는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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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에 부는 봄바람

부산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를 잇는 688㎞의 동해 바닷길을 해파랑길로 부른다. 동해 하면 푸른빛이 먼저 떠오르기에 해파랑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다. 그중 영덕을 지나는 64.6㎞ 구간을 ‘블루 로드’로 이름 붙였다. 해안을 따라 A코스(강구터미널∼해맞이공원·17.5㎞), B코스(해맞이공원∼남씨발상지·15.5㎞), C코스(남씨발상지∼고래불해수욕장·17.5㎞), D코스(대게누리공원∼강구터미널·15㎞)로 나뉜다. 구간별로 대표하는 장소들이 있다. 그 부근을 거닐어도 충분히 푸른 바다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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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말등대 전망데크에서 바다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 ‘약속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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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해맞이공원에선 대게 집게발이 조각된 창포말등대가 여행객을 맞는다.


4개 구간 중 가장 빼어난 풍경을 품은 곳은 B코스다. 해맞이공원에선 영덕을 상징하는 대게 집게발이 조각된 창포말등대가 여행객을 맞는다. 전망데크에서 바다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 ‘약속바위’를 만난다. 새끼손가락만 편 손모양의 바위가 약속할 때 하는 행동을 똑 닮았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해안길에 접어들어 파도가 부딪치는 다양한 기암괴석을 보며 해안길을 걷다 보면 경치를 감상하느라 피곤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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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블루로드 다리.


B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축산항과 죽도산이다. 죽도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섬이어서 죽도였다. 이후 퇴적작용으로 육지와 죽도가 연결됐고, 죽도 뒤에 산이 붙었다.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가 빼곡하게 뒤덮고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정상까지 나무데크를 설치해 쉽게 오를 수 있다. 죽도산 전망대에 오르면 축산항이 왜 미항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바다 산책길을 걷는 여행객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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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산 전망대에 오르면 축산항이 왜 미항인지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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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산 데크길의 바다 풍광.


축산항을 수식하는 말이 ‘천리미항’이다. 미항이야 아름다운 항구란 뜻인데, 천리의 의미가 애매하다. 이는 남씨발상지와 관련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당나라 사신 김충이 일본을 다녀오던 중 태풍을 만나 천리를 표류하다 축산항 부근에 도착한다. 김충은 당나라로 가지 않고 신라에 남는다. 경덕왕은 김충에게 경북 영양 땅 일부와 당나라 여남에서 온 사람이라 하여 남씨 성을 하사했다. 김충이 사신길에 대동한 큰아들은 본래 성인 김씨를 사용했다. 이 둘이 영양 남씨와 영양 김씨의 시조인 셈이다. 지금도 두 집안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남씨발상지는 비석 정도가 전부다. 영양 남씨 집성촌은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괴시마을인데, 고려 후기의 문인 목은 이색의 외가이자 출생지다. 이곳부터는 ‘블루 로드’ C코스에 해당한다. 원래 호지촌으로 마을을 불렀는데,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C코스에선 대소산봉수대를 올라야 한다. 일출 때 봉수대를 오르면 축산항 너머로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봉수대 근처까지 임도가 있어 차로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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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대소산봉수대를 일출 때 오르면 축산항 너머로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봉수대 근처까지 임도가 있어 차로 오를 수 있다.


◆푸름과 어우러진 영덕의 붉은빛

1950년 9월 13일 부산에서 군함 한 척이 출항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영덕 장사항이었다. 국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낙동강 전선 북한 점령지역이다. 다음날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상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높아 수중 모래턱에 좌초됐고 북한군은 집중포화를 가했다. 좌초된 배에서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대원이 속출했다. 결국 목숨을 걸고 상륙해 북한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의 작전기간은 사흘로 계획돼 전투물자도 3일치만 받았지만 목숨을 건 공방은 일주일간 이어졌다. 이들에게 보급된 물품은 소련제 장총 한 자루, 보급품 1㎏, 밀가루 6봉이 전부였다. 식량과 탄약이 모자란 상황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이들은 9월20일 철수를 시작했다. 구출용 LST함은 높은 파도에 접근을 못했고 아군 피해는 갈수록 늘었다. 결국 LST함은 일부를 육지에 남겨둔 채 철수했다. 육지에 남은 그들은 적진으로 돌진해 장렬한 산화를 택했다.

국군이라고 칭했지만, 이들은 4주의 훈련을 받은 학도병들이었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772명이고, 이 중 계급이 있는 진짜 군인은 16명이 전부였다. 나머진 학도병, 피난민, 전쟁고아 등 10대였다. 더구나 이들이 장사항에 상륙한 목적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교란작전의 일환이었다. 어찌 보면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거였지만, 오직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들은 총탄이 퍼붓는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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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해수욕장에 정박해 있는 군함은 학도병들이 장사상륙작전 때 타고 온 문산호를 재현한 것이다.


영덕 남쪽인 D코스를 돌다 보면 해수욕장 한 편에 있는 군함 한 척을 볼 수 있다. 해군기지가 아니고, 군함이 있을 곳이 아닌데 정박해 있다. 장사해수욕장에 정박한 군함은 이들이 타고 온 문산호를 재현한 것이다. 진짜 문산호는 바다에 가라앉았다가 1997년 인양됐다. 장사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 중인 공원은 언제 문을 열지 기약을 못하는 상태다. 문산호 모형만이 덩그러니 일렁이는 파도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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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출신의 항일 의병장 신돌석 생가.


영덕에서 평민 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조국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이들이 바로 의병이었다. 권력자들은 내빼기 바빠도 민초들은 산하를 지켰다. 그 의병 중 가장 익숙한 인물이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신돌석이다. 축산항 인근에는 신돌석 생가와 기념관 등이 조성돼 있다. 명성황후 시해 등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발발했을 때 신돌석도 19세의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해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 본격적으로 의병항쟁에 나선 그는 경북뿐 아니라 강원 원주, 삼척 등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그 휘하에 있던 의병 수가 30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부하 의병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돈 몇 푼에 눈이 먼 부하들은 그를 죽인 후 일본에 현상금을 요구했지만, 생포하지 않았단 이유로 현상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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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조업에 나간 어선이 대게 등 생선을 한가득 잡고 항구로 돌아오고 있다.


현재의 영덕을 더 푸르게 하는 붉음도 곳곳에 있다. 눈에 보이는 붉은빛은 B코스 경정마을에 있다. 경북 동해안지질공원 중 한 곳인 경정리 백악기 퇴적암층이 이룬 편평한 대지가 바다에 펼쳐져 있다.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사암과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이암이 섞여 붉은색을 띠고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붉은 장판이 깔려 있는 듯한 흔하지 않은 풍경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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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원조마을 표지석.


이와 함께 영덕 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게다. 등딱지는 붉고, 배는 하얀 대게가 한창이다. 우선 경정 2리 대게원조마을부터 들러보자. 고려 태조 왕건이 영덕을 들러 경주로 갔는데 이곳에서 영덕대게를 처음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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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처럼 알아듣기 힘든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 경매사의 말을 듣고, 대게 경매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이 안 보이도록 ‘사인’을 보낸다.


원조대게마을이 있지만 아무래도 영덕 대게로 유명한 곳은 A코스의 강구항이다. 강구항은 이맘때 ‘게판’이 된다. 아침에는 공판장에서 갓 잡아온 대게를 판매하는 경매가 벌어진다. 암호처럼 알아듣기 힘든 톤의 목소리로 말하는 경매사의 말을 듣고,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이 안 보이도록 ‘사인’을 보낸다. 순식간이다. 골프채를 든 경매사는 참가자들의 손짓을 일일이 확인하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참가자를 확인한 뒤 대게 주인을 결정한다. 구매를 못한 참가자들이 실망하는 눈치도 아니다. 바로 다음 배에서 잡은 대게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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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강구항은 이맘때 ‘게판’이 된다. 배에서 내린 대게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크기별, 상태별로 구분이 되고 경매가 벌어진다.


배에서 내린 대게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크기별, 상태별로 구분이 된다. 그중 살이 꽉 찬 박달대게엔 흰 띠를 둘러놓는다. 모르는 이들이라도 영덕 박달대게인지 알 수 있도록 한 ‘KS 마크’와 같은 것이다. 동해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도 대게는 다 잡힌다. 영덕 대게가 유명한 것은 집산지였기 때문이다.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된 대게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영덕에 모여 내륙으로 이송되면서 ‘영덕대게’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지는 여러 곳에 있었지만 지리·교통적 편리로 집산지가 되었던 영덕이 대게의 고장이 된 것이다. 인터넷 등으로 판매가 늘어 현지 가격도 싸지 않다. 대게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강구항에서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먹으려면 공영주차장 인근에 있는 동광어시장을 찾는 것이 낫다.

영덕=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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