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관, 가스관, 통풍관 드러낸 ‘노출 건축’... 파리지엥의 자부심
퐁피두 센터의 전경/사진=고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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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낭만의 도시 파리는 수많은 영화와 명화, 사진의 배경으로 우리에게 친숙해 직접 그 장소에 가면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마네와 모네, 로트렉, 샤르트르와 보봐르, 보들레르 등 수많은 화가와 문학가, 철학자의 흔적이 묻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들에서 만나게 되는 그들의 천재성과 열정에 대한 오마주는 파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며 기쁨이다. 미술관 곳곳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인상파의 명화들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도 파리만이 안겨주는 선물. ‘명화’ 속에 담긴 시대적 배경과 철학을 음미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에 전율하다 보면 어느새 파리라는 도시를 다 읽게 된다.
나는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퐁피두센터로 발길을 재촉했다. 건물 파사드에 빨간색 노출 배관의 에스컬레이터가 커다란 조형물처럼 붙은 퐁피두센터는 언제 보아도 새롭고 신선하다. 앞마당에 놓인 칼더의 조각 역시 볼 때마다 힐링을 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미술관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둥글게 감싸는 유리 통로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달뜬다.
◇ 배관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다보면... 파리 시가지가 한눈에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면서 바라본 파리 시가지가 유리 공간 안에서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건축가의 아우라가 담긴 특별한 공간에서의 파리 풍경은 명품 건축의 공간으로 확장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도시 풍경을 경험케 했다. 유리 상자에 들어온 파리 풍경은 그야말로 피로 해소제였다.
퐁피두 센터의 에스컬레이터/사진=고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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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는 현대미술의 메카이며 파리 문화 예술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세운 종합문화센터다. 그 안에 국립현대 미술관을 비롯해 공공정보도서관, 음악·음향탐구연구소, 문화부 등이 들어서 있다. 1977년 완공될 당시 퐁피두 센터는 배수관, 가스관, 통풍구 등의 낯설고 파격적인 노출 건축으로 인해 비난이 거세었지만, 지금은 파리지앵에게 가장 사랑받는 건축물로 회자된다. 40여 년 전의 디자인이었음에도 현재 짓고 있는 여느 미술관 못지않게 현대적 감각이 한껏 묻어 있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공동 설계로, 21세기형 현대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을 미리 감지했던 두 건축가의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퐁피두 센터는 마티스, 샤갈, 피카소 등 소장품 6만여 점을 비롯해 새로운 특별 전시를 기획해 미술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1순위 미술관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맨 위층에는 파리 시내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미술관 입구에 자리한 조각 분수공원은 여행자들의 쉼터이며 파리지앵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장이 시작되는 4층에서 내리면 유리 상자의 긴 회랑을 만난다. 유리와 강렬한 색의 철재를 주재료로 사용한 긴 회랑 공간은 현대적 미감의 극치였다. 긴 회랑을 따라서 멀리 몽마르트 언덕의 사크레 쾨르 성당까지, 파리의 낭만적인 시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한 건축가의 의도와 소통할 때의 기쁨을 그 무엇과 바꿀 수 있으랴. 건축가의 눈으로 바라본 파리 풍경의 색다른 감동은 가히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밀려오는 감동과 비견될 만 하였다.
퐁피두 센터 1층에 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광고 전광판/사진=고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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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퐁피두 센터는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사진, 영화, 건축, 뉴미디어, 설치미술, 그래픽 디자인, 공예, 가구, 산업디자인까지 20세기 초부터 21세기까지의 근현대미술을 총망라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 1400여 점에 달하는 20세기 미술 소장품이야말로 세계 최대 수준이다.
◇ 스트라빈스키 기려 만든 조각 분수공원, 파리지앵과 여행자의 쉼터로
4층 전시장은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 컬렉션이 주를 이루었고 이브 클랭, 아르망, 팅겔리, 세자르의 작품을 비롯해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 조셉 보이스, 앤디 워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설치미술과 그래픽아트, 비디오아트 등 실험적인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브 클랭의 1960년대 퍼포먼스 작품 ‘청색 시대의 인체측정학(Anthropometries of the Blue Period)’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비디오 작품 앞에는 많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40여 분짜리 영상에서 이브 클랭은 아름다운 세 명의 누드모델 몸에 자신이 고안한 독창적인 파란색(IKB: International Klain Blue) 물감을 바르고, 이브 클랭이 직접 작곡한 기괴한 음악에 맞춰 누드모델들은 갤러리의 벽에 붙은 흰 종이 위에 춤을 추듯 몸을 부비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퐁피두 센터의 통풍구/사진=고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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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 전시장으로 가니 20세기 초의 미술계 거장으로 불리는 마티스, 세잔, 몬드리안 말레비치,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루소, 달리, 미로, 파울 끌레, 앙드레 마송, 장 뒤뷔페, 브랑쿠지, 레제 등의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5층 한쪽에는 현대 미술사의 한 획을 바꾸어놓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 Made) 작품 ‘샘’과 ‘자전거 바퀴’가 놓여 있었다. 같은 작품의 다른 에디션을 뉴욕 모마와 로마 현대미술관에서도 본 적 있지만, 볼 때마다 예술 작품에 대한 발상을 전복시킨 뒤샹의 천재성에 매번 탄성을 지른다.
발코니 곳곳에는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조각품이 놓여 있었다.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특별전을 보기 위해 6층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리히터의 회고전은 커다란 울림과 충격이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을 총망라한 전시는 그의 명성대로 감동 그 자체였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미술사의 새로운 획을 그은 리히터는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를 넘나들면서 완벽한 붓놀림과 색의 마술을 보여주었다.
리히터의 전시를 시대별로, 때로는 무작위로 전시장을 오가며 여유롭게 감상하였다. 리히터의 딸 베티를 모델로 한 작품 ‘베티’는 어찌 그리 사실적인지, 마치 베티가 캔버스 안에 사는 듯하였고 ‘촛불’ 역시 ‘훅’ 하고 불면 꺼질 것만 같았다. 작품 ‘11개의 유리판’은 그의 생각들이 응집된 작업이었다. 11개의 유리판을 세워 자신의 전시 작품들과 관객들이 유리에 반사되도록 의도한 또 다른 모티브의 완결된 작업이었다.
퐁피두 센터의 조각 분수공원/사진=고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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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를 나오면 뒤편에 조각 분수공원(La Fontaine Stravinsky)이 있다. 이 분수는 1983년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키네틱(kinetic) 분수다. 스트라빈스키가 한동안 프랑스 국적을 갖고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익숙한 발레곡 ‘불새’와 ‘봄의 제전’의 리듬처럼 유쾌하고 환상적인 조각들이 분수 안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날개가 불꽃처럼 변한다는 의미를 지닌 상상의 새 ‘불새’를 형상화한 새 조각을 비롯해 코끼리, 뱀 모자, 음표 등 다양한 형태의 움직이는 조각들은 분수 안에서 제각각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분수 주변에 삼삼오오 쉬는 파리지앵과 여행자들은 저마다 상상의 날개를 펴며 일탈을 꿈꾸고 있었다. 멋진 쉼터였다.
◆ ‘미술품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하는’ 사진작가 고영애. 그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왔다.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은 작가 고영애가 15년간 지구 한 바퀴를 돌 듯 북미에서 남미로,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옮겨가면서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매혹적인 현대미술관 60곳을 기록한 미술관 기행서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테이트 모던부터 12개의 돛을 형상화한 최첨단 건축물인 루이비통 파운데이션까지, 책에 게재된 60곳 모두 건축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소지만, 그중 하이라이트 20곳을 엄선해 소개한다.
[고영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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