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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박수찬의 軍] 한반도 대화 분위기에 '천안함 피격' 잊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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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용사, PCC-772, 고(故) 한주호 준위, 5.24 조치…. 우리 해군 초계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천안함 피격 사건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세계일보

서해수호의 날인 23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이낙연 총리가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부터),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2010년 3월 26일 늦은 밤 백령도 서남방 2.5㎞ 해상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해군 제2함대소속 초계함 천안함은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고 격침됐다.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해 2000년대 이후 서해상에서 발생한 북한 도발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다.

남북 관계가 서서히 악화될 조짐을 보이던 시기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 사건은 한반도 정세를 급격히 요동치게 한 촉매 역할을 했다. 대북 재제조치인 5.24 조치가 발동되면서 남북 교류 협력은 사실상 중단됐다. 남북 대화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과 5.24 조치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 남북 교류협력은 차질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5.24 조치와 천안함 피격 사건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는 분위기다. 국방부가 있는 서울 용산 삼각지 일대에서는 “군이 눈치 많이 본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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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발로 서해 백령도 바다를 지키던 천안함 46용사가 꽃다운 나이로 산화했다. 사진은 해군과 해난구조 업체 관계자들이 천안함 침몰 20일만인 2010년 4월 15일 백령도 남방 해역에 가라앉아 있는 천안함 함미를 대형 크레인으로 인양하고 있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남북 관계 숨은 뇌관, 천안함 피격

북한은 과거 대남 도발을 감행했을 때, 사안이 중대하거나 역풍이 심각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유감의 뜻을 표시한 경우가 많았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감독하던 미군 장교를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구두 메시지를 유엔군사령부에 전달했다. 2015년 8월 4일 북한이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도발을 감행한 뒤 같은달 25일 남북 합의를 통해 유감의 뜻을 밝혔다.

반면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해 북한은 사과나 유감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대북 특사단이 이달 초 방북했을 때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도 남측에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천안함 피격은 언급이 없었다.

북한이 천안함 피격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남북 관계 개선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천안함 피격에 맞서 정부가 2010년 발표한 5.24 조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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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으로 통하는 경의선 육로를 연결하는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의 모습. 차량 통행이 거의 없어 한적한 모습이다. 파주=연합뉴스


남북 교역 중단, 대북 신규 투자 금지,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불허, 대북 지원사업 원칙적 보류 등 북한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5.24 조치는 인도적 목적이라도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대북 지원을 할 수 없다. 물론 2011년부터 일부 인도적 지원이나 종교인 방북 등 예외 사례가 이어져왔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경의선과 동해선 육로, 서해 직항로, 동해 항로(원산-묵호) 등이 한시적으로 개방됐다. 하지만 교역 중단과 신규 투자 금지라는 틀은 유지되고 있다.

이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 진행되면 경의선, 동해선 등을 통한 남북 교류협력이 뒤따를 전망이다. 남북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려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등 경제 교역이 재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의선과 동해선을 오갈 차량 수요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5.24 조치 해제가 선행되어야 하나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북한의 성의있는 태도 변화가 없는 한 해제가 쉽지 않다. 지난달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남한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에 대해 “천안함 주범의 방남을 용납할 수 없다”는 비난 여론이 거셌던 점을 감안하면 무조건적인 5.24 조치 해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5.24 조치를 유지하면 남북 교류협력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북한 핵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는 비핵화 이행을 통해 풀어가면서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 유도→국민적 동의→제재 해제로 이어지는 출구 전략을 통해 남북 교류협력 활성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잃는 게 더 많은 北 눈치 보기

대화 분위기를 살리든 대북 압박을 지속하든 천안함 피격 희생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것은 국가 안보의 기본이다.

하지만 8년이 흐른 지금, 천안함 피격 사건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제2연평해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에 열리는 서해수호의 날 행사는 올해 이낙연 총리가 주관했지만 예전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 서북도서 지역 전력증강을 홍보하던 군도 올해는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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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운데)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이 지난달 23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북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단장으로 한 고위급 대표단의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한 방남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군 안팎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 분위기가 고조된 올해 초부터 “북한을 자극할만한 군 관련 행사는 로키(Low-key)로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군 당국은 “정해진 바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같은 관측은 현실이 됐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록히드마틴 공장에서 28일(현지시간) 열릴 예정인 스텔스 전투기 F-35A 1호기 출고식에는 공군참모차장 이성용 중장과 방위사업청 강은호 사업관리본부장이 참석한다. 군 당국은 “전제국 방위사업청장은 문재인 대통령 해외 순방 수행, 이왕근 공군참모총장은 국내 대비태세 때문에 불참한다”는 입장이지만 영국, 이스라엘, 노르웨이는 국방장관, 일본은 방위 부대신(국방차관)과 항공막료장(공군참모총장)이 참석한 것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격이 낮다. 북한 눈치 보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해외 방산업체 관계자는 “F-35A 도입국가 중 가장 격이 떨어지는 출고식”이라며 “출고식을 이렇게 치르면 비싼 돈 들여 무기 사고도 판매국에서 좋은 말 못 듣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F-35A 출고식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하고 현안에 대해 미군 관계자들과 비공식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군사외교다. F-35A 구매국들이 출고식에 장관급 인사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라며 “한미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방위사업청이 지난달 말 타우러스(TAURUS)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90여발 추가 도입 계약을 하고도 공개하지 않다가 언론 보도 이후에야 사실 관계만 확인해준 것도 ‘북한 눈치보기’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F-15K 전투기에 탑재되는 타우러스 미사일은 사거리 500㎞로 대전 상공에서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무기다. 동북아에서 이 정도 수준의 전략무기를 확보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중국군 정찰기가 동해까지 진출하는 상황에서 주변국 억제능력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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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군 소속 F-35A 편대가 훈련을 위해 비행하고 있다. 미국 공군 제공


군 소식통은 “F-35A와 타우러스는 중국, 일본 견제에 큰 도움이 되는 전략무기인데, 북한 눈치 보느라 주변국 억제능력 과시까지 희생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군 안팎에서는 올해 안에 도입될 공중급유기와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 전력화 기념행사도 F-35A 출고식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다음달 1일부터 시작되는 한미 연합훈련인 독수리연습도 대외 노출을 최소화한 채 조용히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연합훈련 관련 공지나 취재 지원을 적극 실시하고 필요하면 부풀리기도 했던 몇 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대화 분위기가 살아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불붙을 기미를 보이는 상황에서 남북 대치의 상징인 천안함 피격 사건과 5.24 조치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꺼림칙할 수 있다. 군 관련 행사가 북한을 자극할까봐 걱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로키로 가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이 우리측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논리와 힘을 동시에 내세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솜씨나 논리보다는 그가 가진 힘을 더 의식한다. 고려 초 거란의 침입에 맞선 서희가 거란군 대장 소손녕과 협상을 벌여 거란군을 돌려보내고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은 협상 직전 안융진(안주)에서 거란군을 격파한 고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에 보여줄 것은 보여주면서 대화에 임하는 것은 우리의 협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평화 분위기 조성과 힘의 과시를 함께 진행하면서 북한이 대화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할 경우에 대비해 우리 정부의 독자 제재 문제를 해결할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부와 군이 해야 할 일이다. 외면하고 숨기는 것은 해결이 아닌,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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