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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박수찬의 軍] "해적이 나타났다"…제2의 '아덴만 여명'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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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나이지리아 무장조직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 대원들이 총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기니만 일대에서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해적들은 이들과 연계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게티이미지


해적(Pirate). 세계가 하나로 융합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해적은 기억의 저 편 어딘가에 있는, 실체로 느껴지지 않는 개념이었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보물섬 장난감 속 해적 캐릭터나 동화 ‘피터팬’ 후크 선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전설적인 해적으로 등장하는 잭 스패로를 연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최근 바다에서 활동하는 해적은 동화에서처럼 낭만적이지도, 잭 스패로처럼 유쾌하지도 않다.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정하고 잔인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달 26일 아프리카 가나 주변 해역에서 조업중이던 어선 마린 711호가 나이지리아 해적으로 추정되는 무장 집단의 습격을 받아 한국인 선원 3명이 피랍됐다. 정부는 같은달 28일 소말리아 아덴만에서 작전 중인 청해부대를 긴급 출동시키는 등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현지 사정이 복잡한데다 선원들이 내륙 지역으로 옮겨졌을 경우 소재 파악이 어려워 사태가 장기화될 우려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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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부대 소속 해군 특수전부대 요원들이 해상 표적으로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해군 제공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바다, 기니만

마린 711호가 피랍된 해역은 서아프리카 기니만으로 코트디부아르, 가나, 베냉, 나이지리아와 인접해있다. 외부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소말리아 해적으로 선원들에게 악명 높은 아덴만보다 더 위험하다.

해양수산부가 발간한 ‘2017년 전 세계 해적사고 발생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해적 습격 건수는 180건이다. 이 가운데 45건이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 45건 중 기니만을 끼고 있는 나이지리아 해적의 습격은 33건에 달했다. 같은 기간 아덴만에서 발생한 해적 습격이 9건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나이지리아와 인접한 기니만 해역이 더 위험한 셈이다. 해양수산부는 기니만 해역에 대해 “선원 납치사고가 많은 곳이므로 항해 시 연안에서 200마일(221㎞) 이상의 거리를 두고 항해하는 등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선박을 납치하는 것과 달리 나이지리아 해적들은 선원납치에 주력한다. 실제로 지난해 전 세계에서 해적에게 피랍된 선원 191명 중 나이지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선원은 65명에 달한다. 과거에는 화물을 강탈하기 위해 연안에서 270㎞ 떨어진 먼 바다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선박을 납치할 경우 나이지리아, 베냉 등 인접국 해군에 붙잡힐 수 있어서 외국인 선원만 끌고 간 뒤 거액의 석방금을 받아내는 전술로 변경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 해적들이 칼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성능이 우수한 총기로 무장하고 선박을 습격한다. 지난해 해적이 선박을 향해 발포한 사례 16건 중 7건이 나이지리아 해적의 소행일 정도로 폭력적이다. 항해중인 선박도 거침없이 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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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아덴만을 순찰하던 미국 해군이 해적으로 의심되는 어선을 발견, 조사를 위해 승선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 해군 제공


기니만에서 해적이 창궐하는 것은 풍부한 자원과 부실한 치안,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혼란이 겹친 결과다.

대륙붕이 발달한 기니만은 어족 자원이 풍부해 예로부터 어업이 성했다.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삼각주가 기니만에 접한 나이지리아 남부 니제르 델타일 정도로 비옥한 땅도 많아 농경이 발달했다. 여기에 1957년 니제르 델타에서 발견된 석유는 기니만 일대를 자원의 보고로 만들었고,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피랍된 한국인 선원 3명이 끌려간 곳으로 추정되는 니제르 델타는 나이지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산업 거점이자 무법지대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석유 수입을 독식하는 동안 현지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빼앗겼고, 석유 유출로 농토와 어장이 황폐화되면서 생계조차 꾸릴 수 없었다. 이에 항의하는 현지 주민들을 나이지리아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해왔다. 주민들은 니제르델타해방운동(MEND)을 비롯한 반군 조직을 결성, 송유관에 불법적으로 구멍을 뚫어 훔친 원유를 밀수출하거나 석유 채굴 시설을 습격하는 한편 외국인을 인질로 잡는 등 공격을 감행해왔다. 중국, 한국, 유럽 원양어선 진출과 환경오염으로 조업을 할 수 없게 된 어민들이 이들과 연계해 해적으로 돌변, 선원들을 납치해 몸값을 받아내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의 낮은 관심도 해적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요인이다. 아덴만은 해상 교통로로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이 함정을 파견해 해적을 단속하지만 기니만은 해상 교통로에 위치하지 않아 강력한 무장을 갖춘 선진국 군대의 활동이 뜸하다. 인접국의 정치적 환경이 불안정한데다 해군력도 미약한 상황에서 어선과 유조선을 비롯한 선박들의 통행이 많은 기니만은 해적이 창궐할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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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육군 장병들이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나이지리아군은 해적과 무장단체 소탕에 노력하고 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티이미지


◆피랍 사태 장기화 우려…군사행동 가능할까

한국인 선원 3명의 피랍이 확인되자 정부는 외교부를 중심으로 대응에 나섰다. 외교부는 나이지리아, 미국, 유럽연합(EU) 등을 상대로 정보 수집에 나서는 등 외교적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가 출동을 명령한 청해부대 소속 구축함 문무대왕함은 아프리카 남단을 거쳐 오는 16일 현지에 도착할 예정이다.

하지만 피랍 직후 현지 해군이 추적에 실패하면서 사태가 장기화될 우려가 제기된다. 해적을 체포하고 선원들을 구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적들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 해군 함정과 특수전부대를 투입, 도주로를 차단하고 구출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작전에 실패하면 육지로 달아난 해적들의 소재 파악과 인질의 안전 여부 확인→협상→석방 혹은 무력진압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길게는 수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지난 2010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나포됐던 말레이시아 선박의 선원 11명은 2014년 4월에야 석방됐다.

이번 사건도 해결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 니제르 델타 지역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통제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강줄기가 미로처럼 얽혀있어 숨어있을 장소가 많다. 소재 파악이 되지 않으면 군사작전을 시행할 수 없다.

망망대해에서 한국인 선원이 탄 어선을 표적으로 잡아 습격하고 스피드보트를 준비해 도주하는 등 치밀한 행보를 보인 해적들이 몸값을 올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협상을 지연시킬 가능성도 있다. 선원들을 납치한 해적이 선주로부터 받아낼 석방금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놓고 내부 합의가 늦어질 경우에도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 반면 다양한 세력들이 뒤얽혀 구성된 소말리아 해적과 달리 나이지리아 해적은 이해당사자가 많지 않고, 현지 주재 공관이 있어 외교적 해법을 강구하면 협상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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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부대의 플랫폼으로 쓰이는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해상에서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한 함정이다. 미국 해군 제공


선원들의 석방이 늦어지면 현지로 이동 중인 청해부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문무대왕함(4500t급)과 해군 특수전부대로 구성된 청해부대는 대(對)해적작전과 해상차단 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들이다. 공군 수송기에 특전사 요원들을 태워 현지로 파견하는 방법도 있지만 기니만 일대 국가들과 이렇다 할 군사협력 관련 협정이 없어 병력 파견이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송기가 경유하는 국가들과의 통행 협의 절차, 항로 설정 등의 요소까지 고려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청해부대 투입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간접적 무력시위 및 압박을 이유로 청해부대 투입 사실을 공개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외교적 협상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를 염두에 뒀어야 했다는 것이다. 군 병력 동원 사실을 공개하면 인질범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인질 납치 사건이 발생해 무력동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면 특수전부대는 비밀리에 작전준비에 나서는 게 일반적이다. 1980년 4월 30일 영국 런던 주재 이란대사관 인질 사건 당시 영국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면서 비밀리에 SAS 특수부대를 대사관 인근에 대기시켰다.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영국 정부는 5월 5일 SAS를 투입, 인질범들을 제압하고 인질들을 구출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활동하는 선원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정부가 이번 피랍사건 해결과 더불어 계기로 해적이 기승을 부리는 해역을 항해하는 선박에 대한 정보 제공 및 보안 능력 강화, 현지 해군력 증강 지원, 기니만 일대 국가들과의 군사협력 강화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을 유의해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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