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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5)산산조각 난 문명, 그 위엔 원초적 아름다움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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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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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파괴된 폐허 위에 또 다른 창조와 변형의 흔적이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애잔한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인간의 끈질긴 희망의 감각을 동시에 전해준다. 화산 폭발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음에도 여전히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는 폼페이 유적을 볼 때,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그 계단 위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로마인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들려오는 듯한 콜로세움을 볼 때.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위에 ‘우리가 되찾고 싶은 것들’의 꿈을 끝내 피워 올리는 인간의 멈출 수 없는 열정을 본다. 자연재해로 파괴된 문명도 많지만, 대부분의 유적들은 인간의 폭력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곤 했다. 때로는 문명을 아낌없이 파괴해버리는 것도 인간이고, 이토록 필사적으로 다시 구해내려는 것도 인간임에, 매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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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을 비롯한 온갖 재물에 눈이 먼 스페인 군인들은 멕시코에서 아즈텍 문명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기 위해 가는 곳마다 건물을 부수고 여인들을 겁탈하고 양민을 학살했으며, 그 파괴된 건물 위에 스페인식 건물들을 지었고, 원주민의 종교를 빼앗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하지만 이방인인 내 눈에 비친 멕시코는 식민지 시대의 스페인보다는 원주민 고유의 삶의 흔적이 아직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내게는 식민지 시절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웅장한 성당보다도 멕시코인류학박물관이나 테오티우아칸에 남아 있는 아즈텍 문명의 흔적들, 치첸이트사에 남아있는 마야 문명의 흔적이 더욱 ‘멕시코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아즈텍 문명의 흔적이 소칼로 광장과 차풀페텍 공원 등 멕시코시티 곳곳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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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테오티우아칸은 아즈텍 문명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의 유럽식 건물을 보다가, 테오티우아칸의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석벽을 바라보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정교하고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불국사의 석가모니불을 바라보다가, 어딘가 정겹고 사랑스러운 빈틈이 있는 마애삼존불상이나 운주사 와불을 볼 때 느끼는 그 소박하고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당하는 느낌이었다. 테오티우아칸의 유적은 전체적으로는 장엄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벽화나 벽돌들은 오밀조밀하고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스페인식 건물들이 ‘우리는 이렇게 발전된 기술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너희들을 정복했고,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라고 외치는 느낌이었다면, 테오티우아칸의 ‘달의 피라미드’나 ‘태양의 피라미드’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많은 존재들을 아무 조건 없이 품을 수 있다. 알 수 없지만, 사랑할 순 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순 없지만, 모든 것을 기꺼이 사랑할 순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간 ‘태양의 피라미드’ 위에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아즈텍 문명’

식민지 상처 간직한 ‘테오티우아칸 유적’엔 ‘제3 문명’ 개척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새로운 희망 꿈꿔


나는 아즈텍 문명의 그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태양의 피라미드로 올라가면서,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만나러 올라갔을 때나, 처음 한라산에 올라갔을 때의 그 숨찬 느낌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마치 달의 피라미드나 태양의 피라미드가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만능해결사’가 된 것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저마다의 다채로운 언어로 ‘힘들다, 목마르다, 죽겠다’를 외치며 열심히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달의 피라미드 위에서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는 듯한 사람들의 호방한 포즈가 여기저기서 눈길을 끌어 여행자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아무런 종교가 없는 나조차 달의 피라미드 위에서는 두 팔을 한껏 하늘로 벌려 무언가를 빌고 싶어졌다. 이제 ‘무언가가 되게 해 달라’라거나 ‘무언가를 갖게 해 달라’는 기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진 요즘의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되지 않고도, 삶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무언가를 이루지 않고도, 나 자신을 원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지금 이대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멕시코인류학박물관에는 아즈텍 문명과 마야 문명의 흔적이 집대성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온갖 힘을 쏟는 유럽의 조각상들을 보다가 멕시코 고대문명의 조각상들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 따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겠다는, 무덤덤하고 태연자약한 느낌으로 과감하게 형태를 빚어내는 그들의 솜씨에는 ‘정해진 형태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오직 ‘우리 마음에서 중요한 것들’을 빚어내겠다는 담대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름답게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용을 쓰지 않았는데도, 아즈텍과 마야의 조각상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화가 유화열은 자신의 저서 <색의 나라 멕시코>에서 이런 멕시코 미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홀가분함”, 나아가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그들의 자신감”이라고 명명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수학적이고도 과학적인 아름다움에 길들어 있던 내 눈에 아프리카 미술과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계산되지 않은 어수룩한 아름다움’이 노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그리고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상처받고 무시당해도 결코 눈부신 생의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멕시코 토우(土偶)의 원초적 아름다움으로부터 민중의 끈질긴 생의 의지를 끌어낸 디에고 리베라, 그리고 유럽 미술의 정교한 형식미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며 토실토실하고 뒤뚱뒤뚱한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을 회화의 세계로 초대한 페르난도 보테로. 이 세 사람의 안내를 받아 나는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야생적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되었다. 색채에 대한 원초적 감각과 ‘타고난 끼’는 화가들뿐 아니라 멕시코시티 곳곳의 그라피티 아트, 지붕과 담벼락의 페인트 색에도 깃들어 있었다. 멕시코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드는 색깔’을 내 주변의 세상에 휙휙 뿌려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는 아마추어다’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그저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과감하게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소중한 저잣거리의 민중미술’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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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테오티우아칸이나 치첸이트사 유적을 둘러보기 전에는 ‘안타까운 폐허’를 상상했다. 한때는 찬란히 빛났으나 이제는 쓸쓸한 폐허만이 남아있는 노스탤지어의 장소로서 테오티우아칸이나 치첸이트사를 상상한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가 있어도 ‘폐허의 애잔한 느낌’은 지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 어설픈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멕시코시티는 물론 테오티우아칸이나 치첸이트사 유적은 뜻밖의 활기와 열정으로 넘쳤다. 스페인 제국이 휩쓸고 간 식민지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기는 했지만, 폐허의 쓰라린 상처는 이제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쓰러진 문명 위에서 이미 스페인의 제국도, 원주민의 문명도 아닌 제3의 문명을 개척하고 있었다. 멕시코시티와 그 근교를 돌아보며 나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상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리자 순간접착제로 재빨리 이어 붙이려 하는 시적 화자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멕시코인들은 바로 그 산산조각 난 문명의 폐허 위에서도 남은 산산조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또 다른 문명의 아름다움을 피워 올릴 줄 아는 눈부신 내공을 지닌 듯 보였다.

이제 내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을 때가 있다. 뭔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삶의 에너지가 바닥나버려 ‘이제 내게 뭐가 남았나’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했지만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도, 모든 것을 다 걸고 열심히 일했지만 그 일에 완전히 실패해서 파괴의 잔해만이 남은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한,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그 산산조각 난 마음 위에서도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가 있다. 나는 오래전 멕시코 원주민들이 결코 스페인 제국에 투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꽃을 피워 올리지도 못한 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경험하지도 못한 채 죽어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 타다 남은 문명의 폐허 위에서, 스페인이 다 부숴버리고 자기들의 문명을 새로 세워놓은 바로 그 자리 위에, 완전한 원주민 문명도 아니고 완전한 식민지 문명도 아닌 제3의 새로운 문명을 세워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삶에 대한 사랑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산산조각 난 마음 위에서도 언제나 무언가를 다시 쓰고, 읽고, 고통을 견뎌내 왔듯이. 삶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항상 힘차고 매끄럽게 진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틀거리고 때로는 망설이고 때로는 무너진 채로, 느리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다. 멕시코시티는 내게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전해주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기보다는,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인생을 온 힘 다해 다시 일으키려 애쓰면서, 그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싶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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