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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월드 트렌드, NOW] “예산 집행 주민 아이디어 구합니다” 중국에 부는 ‘우리식 지방자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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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중국 하이난성 하이커우 메이란구의 한 관공서 앞에 설치된 주민투표장 모습. 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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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남단 하이난(海南)성의 성도인 하이커우(海口)시의 메이란(美蘭)구에선 지금 ‘우리 공동체는 우리가 책임진다’는 구호 아래 투표가 한창이다. 언뜻 보기엔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6ㆍ13 지방선거 구호 같아서 지역일꾼을 뽑는 선거가 진행 중인가 싶지만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구 정부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지만, 주민들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투표로 반영하는 절차이다. 여전히 공산당 일당독재인 중국에서 맹아적이기는 하지만, 일반 주민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시도여서 외신들이 주목하고 있다.

하이커우시 메이란구에서 진행 중인 절차는 투표라기 보다는 일종의 여론조사다. 구정부가 예산이 소요되는 공공사업이나 공공서비스와 관련해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다. 공원에 벤치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어디에 몇 개 정도가 필요한지, 시급하게 보수해야 할 도로가 어디인지, 친절도가 낮은 공무원에 대해 어떤 조치가 좋을지 등을 주민 의견 수렴으로 결정하려는 것이다. 15세 이상이면 신분증도 제시할 필요 없이 누구나 관공서 인근에 마련된 투표장에 가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 된다. 의견을 묻는 항목들 역시 구정부가 주민들로부터 취합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선정된다.

서방 언론은 이런 시도가 중국 사회의 긍정적 변화가 되지 않을까 주목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현지시간) “메이란구 주민들은 구정부의 예산 집행을 결정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면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후 공산당의 사회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에서는 수년 전부터 각 부서별 성과 평가에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고 있고,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는 2016년부터 정책 권고안을 제시한 주민들에게 소정의 상금을 주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 사회가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게 중론이다. 광둥(廣東)성의 작은 어촌마을 우칸(烏坎)촌민들이 지방정부의 비리에 저항해 장기간 시위를 벌인 끝에 실질적인 자치권을 획득하자 서방 세계는 환호했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서구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여겼다. 다만 중국 곳곳에서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주민 의견을 수렴해 행정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중국 특색’ 지방자치인 셈이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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