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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의 능선(국립공원관리공단_권리환)
# 등구재, 경산도와 전라도를 잇는 접점
눈앞에 등구재(650m)가 올라올 테면 올라와 보라는 자세로 도보 여행자를 굽어본다. 까이꺼... 생각보다 높지는 않다.
등구(登龜)재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고개인데, 생각보다는 야트막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만들어진 정치적 색깔을 고려해 본다면 두 지역을 가르는 경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장벽 정도는 아닐지라도 건너기 힘든 강과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어야 당연할 법도 한데, 실상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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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문경새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발에 피’다. 등구재는 말이 고개이지 그저 조금 높은 언덕일 뿐이다. 경계의 높낮이로만 보면 문경새재가 가로막은 경상도와 충청도는 벌써 딴 나라가 되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 왜 지난 몇 십 년간 경상도와 전라도는 다른 정치색을 드러내야만 했던 것일까?
이유 없는 사연이야 어디 있을까마는, 그 이유라는 것이 얼추 짐작 가능한 것이고 보면, 지금까지 이어온 그 ‘다름’과 ‘갈등’의 역사가 아쉬울 따름이다. 역사적 배경이라는 것도 딱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고, 결국은 위정자들의 감언이설과 권력 쟁취를 위한 혹세무민의 결과인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글자가 그러하듯 사람들이 속고, 정신이 홀린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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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역사적 연원(이마저도 가설이다)을 따지자면,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해 농지가 풍부한 지역이다. 농지가 많다는 사실은 전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농업혁명의 역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농지는 많은 노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일부 권력자나 지주의 부(富)를 불려주기 위한 노동이었기에 문제가 된다.
10%의 지배계층(관료나 지주)을 위해 90%의 농부는 죽도록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모순이었고, 그 모순은 어느 임계점에 이르면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내부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갈등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지배계층, 특히 가진 자들에게는 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배계층은 스스로의 탐욕과 부조리,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갈등을 지역의 문제로 치환하는 선전선동술을 발휘하였고, 그 결과가 전라도나 함경도가 폄하되고 불이익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경상도의 남인 유생들 역시 조선후기 150여 년 동안 중앙 정계 진출이 막혔던 경험도 그 연장선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오래된 과거의 문제를 들어 특정 지역을 ‘배반의 땅’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사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배제하고, 또 고립화함으로써 권력의 쟁취나 유지 수단으로 악용한 위정자들을 일소하지 못했던 우리의 정치 행위가 문제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위정자들의 혹세무민과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패거리주의에 눈감고 동조 내지 방조한 우리의 정치적 행위가 대립과 갈등, 그리고 분열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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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 일반 대중들이 더 이상 속지 않고, 홀렸던 정신을 다시 돌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파괴적이고 구시대적인 분열의 시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시각이나 행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 빨리 통합과 통섭을 통해 그 갈등의 골이 완벽하게 메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여하튼,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경계’이자 동시에 ‘만나는 접점’인 등구재는 그 어떤 의미로도 ‘다름’을 강요하는, 또는 건널 수 없는 ‘벽‘이 아니더라는 말이다. 사부작사부작 수십 보만 열심히 걸으면 넘을 수 있는 작은 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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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천강을 따라 이어지는 60번 지방도가 놓이기 전에는 이 등구재를 넘어 경상도인 마천의 마을 주민들은 전라도의 인월장으로 오고 갔던 것이다. 팔 물건을 이고 지고 가서 산 물건을 또 이고 지고 넘던 고개가 이 등구재였다. 등구재 외에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오도(吾道)재, 지안재, 팔량치(八良峙) 등이 있다.
등구재를 넘으면 경상남도 함양 땅이다.
1954년 1월, 지리산 빨치산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남도부(본명 하준수)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로써 지리산 빨치산은 역사 속에 묻히게 되는데, 남도부의 고향이 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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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빨치산을 다시, 생각하다.
피로 얼룩진 산마루에 잎이 피고
초연이 흐르던 골짜기에 눈이 내리고
그렇게 천 백 해를 거듭할 때까지
지리산아 다시금 새겨라.
천 백 배의 적과 맞서 굴복할 줄 모르던 용사들의 이름을...
- 어느 빨치산의 시,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들>
지리산의 골짜기에 서면 어디선가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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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매운 삭풍에 가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이름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의 이야기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금기어에 가까웠으니, 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위로를 받을 기회도, 어떻게 살다갔는지 알릴 기회조차 없었던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무시되고 잊혀진 이름으로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수습되지 않은 육신과 고혼은 아직도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고 어느 산자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흐르는 계곡물소리에서도, 산자락을 휘감는 바람 속에서도 그들의 절망적인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당시 너무 많은 청춘들이 지리산에서, 또 다른 산에서 죽어갔다. 전쟁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한, 감당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그들은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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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이 땅의 역사에서도 그들은 단지 ‘빨갱이’로, 그들과 피붙이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에게는 연좌제란 이름의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고, 그랬기에 더욱 철저하게 잊어야만 했던 이름이자 금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잊혀야 했던 그들은 30여 년 전,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과 이태의 <남부군>으로 잠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역사의 무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지리산 유격대’로 알려진, 일명 빨치산(partizan)이다. 전쟁 후에는 ‘남부군‘으로 불리던 좌익 게릴라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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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3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던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당시 국방부에서 밝힌 토벌 전과를 보면, 사살당하거나 생포된 빨치산의 숫자는 무려 21,000여 명(*보고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의 수가 9만여 명가량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토벌된 빨치산의 수가 2만여 명을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은 왜 산으로 갔던 것일까?
해방 후 우리나라 빨치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이 세 사건은 1948년에 연이어 발생하는데,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 투쟁이었던 ’2·8투쟁‘, 제주도의 ’4·3사건‘과 ’여순사건‘이 그 주인공이다. 특히 지리산 유격대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여순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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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산으로 간 이유
여순사건은 1948년10월 20일 당시 하사관이던 지창수의 주도로,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는 것과 38선을 철폐하고 조국 통일을 이루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 등지를 무력으로 점거한 사건을 말한다.(*이 사건 이후 이 땅의 현대사에서 역할이 혁혁했던(?) 악명도 드높은 ’국가보안법‘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여순사건은 사병 중심의 우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초기의 그 위세와는 달리, 단 5일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하지만 투항을 거부한 1,000여 명의 반란군은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등지의 산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지리산 유격대의 효시가 된다. 특히 남로당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간 이들 반란 세력들을 조직화할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 1949년 8월, 뒷날 남부군 사령관으로 유명해지는 이현상(李鉉相)을 파견한다. 공식적인 ’지리산 유격대‘의 탄생이다.
당시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던 남부군은 전쟁 중인 1951년 남한 좌익 빨치산 부대의 재편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대로, ’남부군단‘, 혹은 ’이현상부대‘로 불리어지던 게릴라 부대의 명칭이며, 정식호칭은 ‘독립 제4지대’였다. 이후 지리산 빨치산은 1953년 9월,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1949년 정식으로 지리산 유격대가 조직된 이후 1953년 소멸될 때까지 그들이 행했던 후방에서의 교란작전은 전쟁 중 연합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지리산 유격대 소탕을 위해 1개의 군단을 별도 운용해야 했을 정도로 그 피해의 정도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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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교전 횟수는 무려 1만여 회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 전투로 군경 토벌대는 6천여 명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빨치산의 희생자(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시 엄청나 토벌대 희생자의 2배에 이르는 대략 1만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라고 한다. 일례로 게릴라 혁명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기간 동안 치른 가장 큰 전투가 80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60여 명의 정부군과 벌인 전투였다고 하니, 남한 빨치산이 감당한 유격전의 규모는 과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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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이나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남미처럼 울창한 밀림이나 험준한 산악 지역도 없는 남한에서 어떻게 빨치산들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야 지리산이 대단한 산이지만, 그래봤자 반경이래야 고작 15km 남짓한, 어쩌면 고립된 섬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규모일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빨치산의 근거지는 보통 인구가 적거나 교통이 불편하고, 지형이 복잡하며 산림이 울창해야 근거지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남한의 경우 어디를 가든 인가를 벗어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리산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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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지역적 한계 속에서 빨치산은 1951년 12월부터 4달 동안 3개 사단, 4만여 명의 지리산 토벌대 병력의 대대적인 대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한겨울의 눈 덮인 산을 포위하며 진격해오는 어마어마한 수의 토벌대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능성 제로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리산 빨치산은 비록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 엄청난 추위와 굶주림,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결국은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당시 빨치산들이 그 극한의 고통을 견디게 했던 동력은 대체 무엇이며, 그리고 그 많은 빨치산 전사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정도로 좌익 세력은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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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이 성장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해방 이후 폐허 위에 선 사람들은 생활의 고통과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어떤 구원이 필요했고, 그 희망을 실현시켜줄 세력으로 좌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산당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이념적 요인들은 알 수도 없었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4년간 토벌대를 이끌고 빨치산을 소탕했던 차일혁 총경 역시 그의 자서전에서 그들에게 이념은 애당초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말한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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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들에게 이념이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더란 말인가. 그들에게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그들이 산으로 간 가장 현저한 동인(動因)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었고, ‘한(恨)’이었다고 말한다. 빈곤에 대한 한(恨),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괄시, 당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반발, 특히 일부 우익 청년 단체와 공권력의 초법적인 횡포에 대한 분노가 반사적으로 좌익 동조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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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당시는 미군정과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적 고리를 통해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결탁함으로써, 국내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던 때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반(反)이승만은 곧 빨갱이‘이라는 등식 아래 일부 야당이나 반정부세력조차도 빨갱이로 낙인찍음으로써, 이에 반하는 제 세력들이 좌익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 우익 청년 단체, 특히 서북청년단과 같은 백색테러집단이 정권의 비호 아래 행했던 온갖 불법적이고 무도한 행위들은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좌익으로 이끄는 아주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그들의 초법적인 폭력 행위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되었으며, 이들 피해자들은 불만세력이 되고, 뒤이어 자연스럽게 좌익 동조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한 대 맞고 나온 젊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 번 당한 젊은이는 진짜 ‘빨갱이’가 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익단체의 폭력성은 악명이 높았던 터였다. 단순한 우발적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제주 4·3 사건’이 서북청년단을 위시한 우익집단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섬 전체를 전쟁터로 만드는 실마리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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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농촌 지역에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봉건 질서의 붕괴로 인한 갈등 상황이었다. 양반과 상놈, 지주와 소작농, 주인과 머슴으로 맺어졌던 신분제의 붕괴는 하위 계층의 한(恨)에 방아쇠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이 두 집단 간의 갈등관계는 결국 필연적 약자이자 대항자였던 하위 계층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하대치를 비롯한 적지 않은 소작농과 머슴들이 산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역시 많은 사람들을 산으로 내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산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산에서 죽어갔다. 1만 하고도 수천 명의 그들은 ‘인민 해방’이라는 꿈을 품었으나,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시간에, 그 땅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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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이렇게 세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세 번 죽을 각오를 하고서도, 결국엔 그들이 각오했던 그 이유대로 죽어갔다.
남부군의 빨치산이었던 이태는 그의 책 <남부군>에서 “남한의 빨치산은 처음부터 한정된 운명을 가진 소모품적 성격이었으며, 말라붙은 늪 속의 고기떼처럼 조만간 사멸할 운명을 지니면서도, 죽는 날까지 극한적인 고통을 견디며, 살기 위한 안간힘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실체”였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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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빨치산이 묻는다. “나는 여기에 왜 있을까? 이 깊은 밤, 낯선 산마을 논두렁 위에 무슨 까닭으로... 그리고 저기 오늘 뿌려진 피와 생명에서 무슨 뜻을 찾아야 옳은가?”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이들의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80년대를 살았던 청춘들에게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가르쳐 준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인용하면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역사는 점진적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의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
지리산의 어느 골짜기에서 산화해 간 그들의 삶이 그러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던 그들의 외침이 (이념을 떠나) 오늘날 역사 발전의 작은 디딤돌이 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소수를 제외한 이름 없는 그들에게 이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 것인가? 어떤 작은 이유로 그들은 산으로 갔고, 그 산에서 죽지 않기 위해 그들은 고군분투했을 뿐이었다.
어느 밤 산골짜기 위에 흩뿌려진 피와 생명과 흔적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의 희생이 상징하는 바는, 시대적 모순 앞에서 선택지가 없었던 기층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이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내쳐 달려온 우리네 현대사의 큰 흐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발전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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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존재하는 이유 - 그래도 계속 가야한다.
등구재를 넘자, 길이 호젓하다. 줄지어 늘어선 삼나무 숲길 특유의 활달함이 있다. 어디선가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도 같고, 길이 여유가 있으니 몸은 나른해진다.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순간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잊을 만큼 길이 주는 안온함이 가득하다. 마음도 몸도 느긋해진다. 머무르고 싶은 길이다.
하지만 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만큼은 사람 사는 마을까지이다. 본디 여행이란 ‘돌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품고 있는 여정이기에 길 위에서 머무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오라는 사람이 없어도, 딱히 갈 데가 없어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게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몫이고, 또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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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지리산의 고산준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숲이라는 닫힘의 공간에서 사람 사는 곳의 열린 공간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서두른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그 곳이 머지않았음을 몸이 먼저 아는 체를 한다. 또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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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정보
◈ 버스
서울(소요시간 4시간 32분)
서울 → 동서울종합터미널(02-446-8000) → 백무동시외버스정류소 →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
◈ 자동차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길 5/ 055-964-8200) 주차
[박대영 기자 cyumi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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