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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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그 흔한 맥도널드도, 스타벅스도, 켄터키프라이드치킨도 없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할인마트도, 자라(ZARA) 같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도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모바일 데이터’가 통하지 않는다. 십여 년 동안 수십 나라를 바지런히 돌아다녀보았지만 모바일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나라는 처음이어서, 내심 아날로그적 삶을 꿈꾸는 나조차도 당황했다. 배낭여행 초보자일 때는 종이지도를 신줏단지 모시듯 꼭 가지고 다녔지만, 이제는 ‘구글맵’이 더 편해져버린 내 자신이 쿠바에서는 유별난 스마트폰 중독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 구글맵도 찾을 수 없고, 궁금한 e메일도 마음대로 열어볼 수 없고, SNS의 항시적 불통은 물론 공식적으로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채널도 5개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미디어키드로 자라난 내가, 과연 미디어와의 ‘접속’이 지독히 불편한 이 나라에서 ‘쿠바 여행을 향한 낭만적 기대’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은 한마디로 기우였다. 멕시코, 칠레, 브라질, 페루, 쿠바, 아르헨티나, 이 모두가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나라들이었지만, 가장 다시 가고 싶은 나라, 적어도 한 계절쯤은 꼭 살아보고 싶은 나라는 역시 쿠바였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그리고 <체 게바라 평전>을 질리지도 않고 보고 또 봤던 나였기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까봐’ 가장 걱정스러웠던 나라 쿠바. 그러나 쿠바는 나를 전혀 실망시키지 않았다. 텔레비전 여행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던 아바나는 더더욱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는 아바나에서, 런던에도 아테네에도 베를린에도 파리에도 없는 그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 번도 풍요를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오히려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풍요로운 생의 활기와 온기를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아마 니체가 아바나를 방문할 수만 있었다면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꿈꾸었던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에 대한 사랑, 삶 그 자체에 대한 사랑)가 도시 전체의 구석구석에 깃들어 있는 장소가 바로 아바나임을 단번에 포착했을 것 같다.
이 온기와 활기는 삶이 마냥 기쁘고, 사람들이 무작정 명랑하고, 좋은 일들만 가득 일어나서 느끼는 외부 환경의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쿠바에서는 짠하고 애처로운 풍경이 많았다. 거리의 맹인 가수는 내가 들어본 어떤 버스킹보다도 애잔하고 구슬픈 목소리로 사람의 가슴을 쓰라리게 휘젓는 노래를 불렀고, 하수구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벽들과 돌담이 허물어져가는 집들도 많았다. 하지만 쿠바인들은 내가 방문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넉넉한 인심과 해맑은 미소로 여행자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풍요 때문에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기에 그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당에 가면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히토 한 잔이나 스파클링 와인 한 잔 정도는 식전 음료로 그냥 제공하는 곳도 많았다. 유럽의 레스토랑처럼 아무리 배고파도 종업원이 주문을 받을 때까지 하염없이 무작정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않아서 좋았다. 쿠바 레스토랑은 앉자마자 손님에게 음료와 빵을 제공하고, 여성 손님에게 모든 음식을 먼저 서빙해준다. 게다가 계란도 버터도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쿠바식 빵은 정말 맛있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쿠바 리브레(Cuba libre·화이트럼을 차가운 얼음 위에 부은 뒤, 콜라와 라임 즙을 넣어 만든 칵테일) 같은 칵테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들 정도로 아바나 사람들의 ‘술 인심’은 좋다. 싸고, 맛있고, 무엇보다도 ‘이방인의 경계심’을 풀어놓는 아바나 사람들의 둥글둥글한 미소가 ‘한 잔 더’를 외치게 한다. 아바나에서 모히토로 가장 유명한 곳은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잘 알려진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다. 헤밍웨이의 감성 충만한 흑백사진으로 가득한 이곳은 하루 종일 인산인해를 이룬다. 헤밍웨이가 자신만의 독특한 ‘다이키리’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다는 플로리디타(Floridita)는 아바나 최고의 술집으로 유명하다. 플로리디타에서 헤밍웨이는 화이트럼 더블 샷, 라임과 자몽주스, 잘게 부순 얼음을 넣어 다이키리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는데, 이것은 엘 파파 도블레(El Papa Doble)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다. 쿠바를 제2의 조국으로 삼았던 헤밍웨이를 ‘파파’라고 불렀던 쿠바 사람들의 애정이 듬뿍 묻어 있는 칵테일이다.
SNS·이메일 등 지독하게 불편
한 번도 풍요 경험 못 해본 나라
아날로그 삶 꿈꾸는 나조차 당황
계란 없이도 계란 맛 내는 요리법
걷기 생활화·재즈 향한 무한 사랑
궁핍 속 ‘활기’ 지킨 낭만주의자들
‘서로 도와가며 살자’ 인식 반영된
배급카드 ‘리브레타’ 본받을 만
쿠바는 한 번도 부강했던 적이 없지만,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조차도 놀라운 창의력과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극복해냈다.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믿음, 쿠바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자부심 등 여러 가지 정신적 에너지가 있겠지만, 쿠바 사람들 특유의 눈부신 낙천주의 마냐냐(manana)가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이든 어떻게든 다 잘될 것이라 믿는 마냐냐 정신은 모든 역경을 ‘해결될 수 있는 것’, ‘우리가 노력하면 이겨낼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가치관이다. 미국의 잔인한 경제 봉쇄 조치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시절, 그들은 계란 없이도 계란 맛을 내는 요리법, 고기 없이도 고기 맛을 내는 요리법을 개발하며 배고픔과 궁핍을 견뎌냈다. 당시 사람들은 자동차 연료가 없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했지만, 그 결과 국민의 평균수명과 건강은 더욱 증진되었다고 한다. 콜레스테롤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뇌혈관계 질환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자동차 연료마저 부족해지자 더 많은 사람들이 ‘걷기’라는 최고의 운동을 생활화함으로써 국민건강은 더욱 증진된 것이다. 걸핏하면 길에서 퍼지는 오래된 클래식 자동차들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고쳐내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정비공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와 교육,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 발레와 재즈와 클래식 음악 등 예술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쿠바인들은 여전히 그 어떤 다국적 자본과 무한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의 삶, 우리만의 가치’를 지켜내는 낭만주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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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꿈꾸기보다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즐기고 누리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 같다. 춤과 노래를 물처럼 공기처럼 들이마시고, 일상적인 대화도 왠지 콧노래나 허밍처럼 음악적으로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월급은 터무니없이 낮지만, 쿠바 경제 시스템의 근간에는 여전히 ‘배급’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에게는 최신형 스마트폰이나 UHD 텔레비전은 없지만, 무상교육, 무상의료,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배급’이라는 삶의 원천이 있다. 쿠바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배급제가 중단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62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이 배급제를 통해 사람들은 식품과 신발, 의류 등 대부분의 생필품을 구할 수 있다. 신혼부부에게는 웨딩 케이크와 맥주 세 상자, 그리고 예복이 제공된다. 쿠바의 배급카드를 리브레타(libreta)라고 하는데 나는 이 단어의 뉘앙스와 울림이 너무 좋아 자꾸만 따라해보았다. 리브레타, 리브레타. 리브레타는 어쩌면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계속하게 해주는 것, 아무리 어려워도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는 용기를 주는 그런 시스템이 아닐까. 리브레타, 리브레타. 그 말이 너무 어여뻐서 한참을 입속에서 혀를 가만히 굴려가며 발음해보았다.
리브레타, 사람을 끝내 살게 해주는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우리에게도 리브레타 같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구제 시스템이 있었다면 송파구 세 모녀의 자살 사건 같은 생존을 비관한 자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인 가난 때문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비참함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고, 남들에게 부끄럽고,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내야 하지 않을까. 쿠바인들은 생존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리솔베르(resolver), 즉 ‘해결하다’라는 뜻의 동사를 사용한다.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는 넘지 못할 장애물이 아니라 언제든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사람들이 생존의 공포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쿠바 음식 중에 아히아코(Ajiaco)라는 음식이 있다. 나는 이 아히아코가 워낙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우리의 ‘엠티찌개’나 엄마가 끓여준 부대찌개처럼 그렇게 감칠맛 나고, 정겨운 맛이었다. 소고기, 옥수수, 단호박, 감자, 보니아토(고구마) 등을 가득 넣고 끓인 쿠바식 스튜다. 나는 아히아코를 내 나름대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쿠바인들의 마냐냐 정신을 담은 수프라고 이해했다.
이렇게 얼기설기, 얼핏 보면 대충대충, 있는 것들을 다 때려 넣어서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데, 우리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해결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리브레타라는 단어를 들은 이후로 계속 그 말의 아련한 여운이 귓속을 맴돌았다. 리브레타, 리브레타, 마치 러브레터처럼 달콤하고 따사로운 그 이름. 나는 리브레타를 마치 기도처럼 되뇌며 기원했다. 오늘도 당신이 너무 많이 아프지 않고, 다만 잘 있기를. 잘 존재하기를. 잘 살아내기를. 리브레타, 그것은 아무리 생이 힘들고 아프고 쓰라려도, 언제든 그 매일의 삶 속에서 생의 눈부신 기쁨들을 발견해낼 수 있는 축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리브레타, 리브레타, 부디 살게 해주소서.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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