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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 환상적인 초콜릿 언덕, 귀여운 안경원숭이가 있다는,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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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낭만적이고 고요한 필리핀을 보고 싶다면... 보홀섬으로
손바닥만 한 안경원숭이와 반딧불이를 만나는 찬란한 밤

조선일보

섬의 중심엔 은박 포장지의 초콜릿을 닮은 1268개의 언덕이 있다. 로맨틱한 이름을 가졌지만, 아고로라는 거인이 사랑하던 여인과 이뤄지지 못해 흘린 눈물이 굳어져 만들어졌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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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잠자리에 들면서 자주 상상한다. 내 작은 침대가 고요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떠다니는 쪽배가 되어 어느 섬의 구석구석을 떠다니는 상상. 필리핀의 남쪽, 보홀이 겹쳐진다. 날마다 푸른 파도의 소리를 들으며 그날 본 달콤한 풍경들을 회상하며 잠이 들면, 내가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그날처럼 좋은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날마다 작은 섬 안의 골목들을 따라 꿈속을 걷듯 걷는다. 헤맨다. 헤엄친다.

◇ 세부보다 달콤한 섬 보홀… 초콜릿 언덕은 커플 인증 필수 코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운 섬이 있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휴양지 세부(Cebu) 바로 아래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곳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화려한 것들의 이면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편리하고 깨끗한 휴양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세부에서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부에 비하면 보홀은 그야말로 자연에 가까운 섬이다. 계획되고 정비된 곳이라기보다 원래 섬의 형태가 잘 보존된 곳이다.

바다를 보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비행기가 보홀의 탁빌라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초콜릿 힐(Chocolate Hills)에 달려갔다. 배낭을 내려놓기도 전에 다 늙은 남자가 초콜릿 언덕이라니. 누군가 초콜릿 언덕에 대해서 말했을 때부터 목구멍으로 군침이 돌았으며 홀로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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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가까운 아름다운 섬 보홀./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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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1268개의 언덕. 누구나 잘 아는 은박 포장지의 그 초콜릿과 닮았다고 해서 초콜릿 언덕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많은 사람을 유혹한다. 언덕을 보기 위해 오르는 전망대의 계단도 발렌타인데이의 의미를 담아 214계단이다. 이 정도의 상술 정도야 귀엽게 여겨야 하지 않겠나. 부드럽고 둥근 능선이 송곳 같은 더위도 잠시 무디게 만든다.

이 둥근 언덕들은 200만 년 전에 바다로부터 솟아난 표면의 산호층이 부식되면서 아름다운 초콜릿 군락을 만들었다. 일부러 만들기에도 버거운 크기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 같은 형태로 앉아 있다.

거대한 초콜릿 상자를 열어 보는 듯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상당히 로맨틱하고 슬픈 사연이 있다. 아고로라는 거인이 사랑하는 여인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수천 년간 굳어져 이 언덕이 되었다고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수많은 커플이 인증샷을 남긴다.

◇ 귀여운 안경원숭이와 찬란한 반딧불이 있는 보홀의 밤

초콜릿 힐에서 울창한 밀림을 끼고 남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면 이번에는 달콤함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귀여운 원숭이를 만날 수 있다. 일명 안경원숭이라고 불리는 원숭이 보호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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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보다 작은 보홀의 안경원숭이, 귀여움이 실존한다면 바로 이 녀석이 아닐까?/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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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힐만큼이나 보홀의 유명세를 알리는데 한몫한 이 원숭이는 손바닥 보다 작다. 고작 10~12센티의 작은 몸에 얼굴에 얼굴이 반이다. 맑고 투명하게 튀어나온 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귀엽다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결국 이 작은 안경원숭이가 될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 밤에만 활동하기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는 않고 잠을 잔다. 덕분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는 고요함으로 만나야 한다. 원숭이와 함께 잠을 자듯 고요히 바라보다 보면 정말 살아있는 생명인지 인형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렇게 달콤함과 귀여움에 정신을 잃고도 힘이 남아 있다면, 이제 찬란하게 움직이는 별들을 보러 가자.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곳에서만 서식한다는 반딧불을 보러 가는 것이다. 보홀이라서 가능하다. 그러니까 당연히 봐야 한다.

밤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둘씩 켜지는 별들. 가난한 사람들이 오두막에 촛불을 켜듯 아득한 하늘에 별을 달듯 동화 같은 밤이다. 간혹 피곤한 사람들은 조용하게 날아다니는 별들을 보며 잠이 들 수도 있겠다. 꿈처럼 날아오르는 수많은 반딧불. 말로 설명할 길이 없는 잔잔한 이 풍경은 사진에 담을 수도 없는 빛이라 오로지 눈으로 인화되는 일만이 유일한 저장법이다. 푸른 바다보다 먼저 만난 달콤한 풍경. 하루 만에 나는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거나 부드러워졌다고 자부한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변은 보장된 아름다움이라면 스스로 만드는 달콤한 추억의 하루가 될 수 있겠다고 여긴다.

◇ 만만하고 살가운 외딴섬, 팡라오

충실하게 숙제하듯 첫날을 보낸 덕에 깊고 아름다운 꿈을 꾼 듯하다. 둘째 날이 밝았고 바로 섬의 섬을 건너 팡라오(Panglao)로 갔다. 보홀에서 작은 다리로 이어진 섬이다. 그러니까 걸어서 건너는 섬이 되겠다. 보홀에도 아름다운 해변이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팡라오로 건너온다. 보홀은 필리핀에서 10번째 큰 섬이니, 그것에 비한다면 보홀이 흘린 초콜릿 한 알 같은 작은 섬이 팡라오다. 혹은 안경원숭이처럼 작은 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바다로 이어진 골목들도 담이나 집보다 숲이 길을 내는 곳. 낮고 작은 숲들을 지나 펼쳐지는 해안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면서 봤던 풍경들 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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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홀은 화려한 치장도 없고 볼만한 건축물도 없다. 그래서 걷기 좋은 해변. 낮에도 밤에도 고요하고 평화롭다./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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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치장도 없고 거대한 건물들도 없는 알로나 비치(Alona Beach)를 중심으로 펼쳐진 해안들은 그야말로 걷기 좋은 해변. 다이빙에 열을 올리는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산소통을 메고 나가는 보트 뒤로 새하얗게 물거품이 부서진다.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것들이 여기서도 이루어지지만, 이곳은 좀 더 낮고 고요한 느낌이다.

종일 해변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과 뭔가를 열심히 파는 사람들과 산책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구분 없이 오가는 해안에 번잡함이란 없다. 유명세를 치르는 섬에 비한다면 외딴섬이라 하겠다.

작은 섬이라 오히려 곁에 바짝 당겨 앉은 느낌이다. 만만하고 살갑다. 그래서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는 부담 없는 섬. 택시 대용으로 팡라오 전체를 돌아다니는 오토바이는 하발하발이라고 부른다. 이름처럼 뭔가 허술한 느낌이지만 오토바이를 운전사가 데려다준 히낙다난(Hinagdanan) 동굴은 천연 석회암 동굴로 한가운데 작은 호수가 있다.

섬에서 섬으로 건너와서 섬 안의 또 다른 작은 바다를 만나는 것처럼 여겨졌다. 운전사의 과장된 설명에 비한다면 볼 것이 없는 곳이었지만 잠시 더위를 피한다는 생각이면 좋겠다며 나무랄 마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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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달콤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좋은 꿈을 꾸게 될 것만 같은 달콤한 섬 보홀./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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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축물이라고는 성 어거스틴 성탕과 근처의 종탑이 전부다. 하긴 누가 휴양지에 와서 공부하듯 유적지를 다니겠는가? 작은 섬의 안쪽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걷거나, 그저 이곳은 자신이 정한 날짜 동안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여행이다.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바라보며 조금씩 닮아가는 일.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배낭을 꾸리는 것이 아닐까?

PS 보홀의 일상

휴양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다. 숙소의 규모에 따라서 지내는 동안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맞는 숙소를 정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보홀도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즐길 수 있는 해양 스포츠들이 많다. 또 각종 투어가 있는데, 육상투어와 해상투어를 하루씩 경험하는 것도 좋겠다. 모든 투어나 스포츠 역시 숙소에 의뢰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다. 환전은 알로나 비치보다 보홀 시내에서 하는 편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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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변종모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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