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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자존감도 좋지만…그게 다 자존감 낮은 내 탓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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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자존감 향상 트레이닝 열풍


▶ 한때는 ‘힐링’이란 단어가 사회 전체의 화두더니, 이제는 ‘자존감’이란 단어가 화두가 됐다. 연애, 결혼, 취업, 직장 등 2030이 갖고 있는 모든 고민들의 해결책은 “자존감을 높이라”는 것으로 제시된다.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면 정말 높아질까. 심리상담소에서 상담을 받고,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을 들으면 나는 나를 소중히 대하며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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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청년층에 자존감 열풍
자존감 관련 서적·강의 인기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업체 생겨
“자존감 높여준다더니 물 팔더라”

모든 문제를 자존감 탓하며
’자존감 장사’ 하는 사회
“자존감은 성적표 아냐
내 단점까지 수용해야”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하면 진짜 높아지나요?”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한 심리상담소 문을 열면서 나는 불신에 가득찬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마주앉은 선생님(심리상담사)은 웃으며 “자존감은 높일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많이 속상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이후 가족 관계는 어떤지, 내 성격은 어떤지, 성장과정은 어땠는지,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는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졌다. 다소 관련이 없는 듯한 질문들이었는데도, 한 시간 가량 내 이야기를 하고 나자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이 뭐였어요?”(심리상담사)

“원하는 대학에 못 간 것, 이런 건 좌절이라고 보면 안 되는 거죠?”(나)

“정답은 없어요. 본인이 느끼는 대로 말하면 됩니다.”(심리상담사)

“최근 마음이 많이 힘든가요? 어느 정도로 힘든가요?”(심리상담사)

“‘힘들다’의 객관적인 기준이 뭔가요? 어떤 증상을 겪어야 힘든 거죠?”(나)

“스스로 힘들다 느끼면 힘든 거지, 기준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심리상담사)

대부분의 질문에 나는 ‘객관적인 기준’과 ‘정답’을 찾고 있었다. 상담사는 내게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인데도, 객관적인 기준과 사회에서 바라는 정답을 찾으려 한다”고 진단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만의 기준에서 느끼고 행동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계획을 하지 않고는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쉬지 않고 뭔가를 하는 것”이라며 “당분간은 계획도 세우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보라”고 말했다.

한 시간의 심리 상담으로 내 자존감이 높아졌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심리상담에서는 최소 12회 상담을 받길 권한다. 그러나 평소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계기가 없었기 때문에 내 입으로 나를 이야기해본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돌아본 계기가 됐다. 요즘 대부분의 심리상담소들은 ‘자존감 향상’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내세우고 있다.

자존감 열풍

자존감이 화두인 시대다.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의원(정신과 전문의) 원장이 쓴 <자존감 수업>은 2016년 9월 출간된 지 1년만에 45만부가 팔렸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집계한 2017년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과 더불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조유미) 등 자존감 높은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책들이 올해 상반기에도 인기를 끌고 있다. 법륜스님, 김창옥 교수, 김미경 강사 등의 ‘자존감 높이기’ 강의는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40만∼50회에 이른다.

자존감(자아존중감·self-esteem)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미국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사용했다. 그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으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자살에 이르게 된다고 봤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개념이다. 윤홍균 원장에 따르면,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평가로부터 나온다. 자신감은 자기 일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 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능력치에 비해 어려운 일을 할 땐 자신감이 떨어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엔 자신감이 높아진다. 또 자기 일의 어려운 정도를 너무 낮게 평가하거나 자기 자신의 능력을 너무 높게 평가해 자신감이 지나치게 높아져 있는 상태는 자만이다.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환경의 영향으로 특히 2030 청년층에게 자존감 열풍이 불고 있다. 그들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여기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최근 ‘알바천국’이 회원 164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2018 자존감을 말하다’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까운 47.9%가 현재 자존감이 ‘낮다(31.3%)’ 혹은 ‘매우 낮다(16.6%)’라고 평가했다. ‘높다(12.6%)’ 혹은 '매우 높다(4.8%)’라고 답한 응답자는 17.4%에 불과했다. ‘보통’으로 응답한 비율은 34.7%였다.

청년 절반이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는 현상은 그들을 대상으로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업의 성황으로 이어진다. 온라인 스타트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3월 설립된 A업체는 자존감을 높이는 단계별 미션과 일 대 일 상담을 제공한다. A사의 1단계 프로그램 ‘나를 찾다’는 ‘나 보고서’를 작성하며 나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과정이다. 2단계 ‘행복을 찾다’에서는 감사 일기 쓰기, 운동이나 명상 등 개인 맞춤형 미션이 주어진다. 3단계 ‘일상을 찾다’는 자존감에 이르도록 하는 자기 실천이 강조된다. A사는 10일 기준으로 그동안 이용자들이 수행한 개별 미션이 9만8천여개(누적)라고 밝혔다.

자신을 깨라며 달걀을 깨게 했다

“이 달걀에 자신이 깨버리고 싶은 단점을 써보세요.”

이아무개씨가 B업체의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에 참여한 첫날, 강사는 달걀을 나눠 줬다. 이씨는 ‘매사에 의욕없고 무력함’이라고 썼다. 강사는 달걀을 깨라고 했다. 이씨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라고 생각하면서도 강사가 시키는대로 달걀을 깼다.

직장 생활 5년차, 이아무개씨는 종종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상사의 사소한 지적에도 눈물이 터져나와 난감한 적도 있었다. 이런 증상을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자 다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다’는 진단을 내놨다. 자존감 관련 책을 몇 권이나 읽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던 이씨는 우연히 온라인에서 자존감을 높여준다며 광고하는 업체들을 접했다. 마침 그 중 B사가 회사 근처에 있어 상담 신청을 하고 찾아갔다. 간단한 검사와 상담 후, 상담사는 이씨의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상태며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상담사는 이씨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아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뭔가에 홀린 듯 수십만원이나 하는 수강료를 내고 등록했다.

수강자들과 한 팀을 이뤄 수업을 듣고 공동 미션도 달성하는 프로그램에서 이씨가 팀장이 됐다. 직장에서 한 번도 팀장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큰 부담을 느꼈다. 이씨의 팀은 매일 3㎞씩 달리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단체 카톡방에 각자 ‘인증샷’을 올렸는데 팀원 대부분이 목표를 잘 지키는 것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고 자신이 팀에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됐다. 매일 ‘감사 일기’도 썼다. 이씨가 일기에 쓴 내용들은 ‘회사 앞에 맛있는 커피숍이 생겨서 감사하다’, ‘감기에 걸리지 않고 환절기를 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 같은 것들이었다. 이렇게 8주가 지나자 이씨는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믿었다.

다음엔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는 수업을 들었다. 연예인이 입고 나온 옷이나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울리는 옷 입기와 메이크업을 배울 수 있길 기대했다. 강사는 매일 지켜야 할 ‘뷰티 습관’으로 미네랄이 들어간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 역시 물통을 들고 다니며 습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지막 수업 시간에 강사는 미네랄이 많이 든 물을 추천한다며 국내 한 회사의 물을 팔았다. 이씨는 “구매 강요까지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시중 가격보다 싸지도 않았는데 많은 수강자들이 몇 박스씩 물을 사는 것을 보며 놀랐다”며 “문득 장삿속 같아 속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씨의 자존감은 높아졌을까.

“자존감 트레이닝을 받으며 나의 가치관이 뭔지, 내 삶의 목표가 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긴 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아는 것과 자존감이 높아지는 건 별개였다. 내 단점을 고치는 것도, 단점을 가진 나조차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자존감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가 모든 문제를 자존감 낮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것 같다.”

자존감 권하는 사회

자존감 열풍은 언제부터, 왜 불었을까. 심리학자 김태형(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이 쓴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에 따르면 198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자존감이 한국에서는 30여년쯤 지나 유행하기 시작했다. 저성장 사회에서 큰 성취감을 얻기 어려워진 2030세대가 스스로를 소중하게 대할 방법을 찾게 됐다는 분석이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자존감 열풍이 분 데는 <자존감 수업>의 인기도 한몫 했다. 이후 자존감을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나왔다. 자기계발의 열풍에 이어 실패와 좌절에 대한 위로가 뒤따른 셈이다. 최근 1인 가구가 늘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주목한 탓도 작용했다. 직장과 자신을 동일시해온 장년층과 달리 직장과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청년층의 욕구에도 부합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개인의 자존감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적 역동성이 떨어지고 청년들이 자존감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될수록 사회의 책임을 그들의 자존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손 쉽지만 무책임하다.

심리학자 허용회 마인드플레이팅 대표는 “자존감 열풍을 둘러싼 심각한 오해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곧 자기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암묵적 전제”라고 꼬집었다. 자존감 향상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상당수 담론들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대인관계, 일의 문제를 결국 ‘자기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는 것’의 문제로 돌린다는 뜻이다. 그는 “자존감은 구세주와 같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존감이 모든 것들의 문제였으므로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일도, 대인관계도 술술 잘 풀려나가리라는 마법 같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실제론 ‘자존감 장사’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자존감 관련 상담을 해온 한 심리상담가는 “최근에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자격증도 없이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업체들도 많다”고 했다.

“자존감이란 자기 스스로 평가하는 것 뿐인데도 사람들은 성적표로 여긴다. 자존감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폭이 사람마다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낮아져도 다시 높아질 수 있는 회복 탄력성도 중요하다. 결국은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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