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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미소년의 키스 돌진…바람과 함께 사라진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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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 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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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호시오 광장. 바다처럼 물결치는 바닥 장식이 인상적이다. [사진 박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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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사내아이였다. 이제 겨우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을 나이의 곱슬머리 아이. 리스본의 주황색 가로등은 그의 눈이 여자를 향해 상냥하게 웃는 것을 비추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아이는 마치 연인을 향하듯 여자에게 돌진했다. 여자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의 코가 여자의 이마에 닿은 후였다. 여자는 몸을 뒤로 젖혀 겨우 아이의 키스를 피했지만 역시 사내아이가 훨씬 더 빨랐다.

이것이 로맨틱한 리스본에서 지긋한 나이의 동양 여자와 유럽의 사내아이가 운명적으로 만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분이 좀 나으련만 불행히도 아니다. 1초 아니 대략 0.3초 안에 꿈처럼, 마술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허리에 두르고 있던 힙색이 사라졌다.

리스본 호시오(Rossio) 광장에서, 수없이 들었던, 그 믿기지 않을 만큼 예술적이라는 유럽의 소매치기를 하필이면 내가 직접 당하고야 말았다. 리스본에 도착하고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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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리스본. 리스본은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소매치기를 당한 호시오 광장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 박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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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연인들이 키스를 나누며 지나는 거리 한가운데 서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내 배를 내려다보며 배와 엉덩이, 허리를 연신 더듬었다. 잔잔한 파도가 흐르고 거리 악사의 기타 소리가 울리는 레스토란테 거리에서 한참이나 그러고 서 있던 나를 누군가 봤다면 분명 살짝이 정신이 나갔거나 일찌감치 술에 취한 여자로 알았을 것이다. 아무리 만져봐야 사라진 힙색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정말 없다.

“믿을 수가 없어요. 지퍼가 열려있고 거짓말처럼 지갑만 사라졌어요. 내내 이렇게 꼭 안고 다녔다고요.” 신시내티에서 왔다는 여자는 반쯤 얼이 빠져버린 표정이다. 밤 10시 리스본 경찰서는 나만큼 멍청하고 나만큼 순진하며 낙천적인 얼굴을 하는 여자로 바글바글했다. 국적과 인종은 다양했는데 신기하게 베를린에서 왔다는 덩치 큰 남자를 제외하면 피해자는 모두 여자였다.

내 앞으로 스무명쯤이 사고 신고, 아니 범죄신고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심되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도시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은 기묘하게 날 토닥여줬다. 급기야 난 울고 있는 네덜란드 여자아이를 위로할 수 있을 정도로 침착해졌다. 내가 힙색을 통째로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최소한 그의 여권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는지 노을색 머리를 한 아이가 날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프로예요. 타깃이 되는 순간 당신이 그들을 피할 방법은 없어요.” 나를 담당했던 경찰관 페르난도는 자책하던 나를 달랬다. 하긴 아무리 복기를 해봐도 아예 숙소에 두고 나온 것이 아닌 이상 방법은 없었다. 정말 옷 속으로 복대라도 둘렀어야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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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오 기차역은 이 건물 2층에 있다. 주황색 조명이 아름다운 리스본의 밤 풍경. 바로 이 건널목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사진 박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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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포르투갈 사람들이 아니라 외지인이 문제죠.” 페르난도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도도 없고 소매치기의 국적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언제 어디에나 외지인을 향한 두려움과 혐오가 있게 마련이지만 어쨌든 치안은 그들의 책임이 아닌가? 난 따질 힘도 없어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난당한 품목을 적었다. 쓰고 보니 왜 이리 많은지.

현금만 통용되는 지역으로만 두 달가량의 여행을 계획한 만큼 이번엔 꽤 많은 유로를 환전했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숫자로 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휘청한다.

현금 외에도 크레딧카드 두 장, 리스보아카드, 포르투갈 교통 비바카드, 선블록 스틱과 립밤, 지도 보기용 휴대폰, 무려 블루투스에 삼각대 기능까지 장착한 신상 셀픽 스틱,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 그리고 나의 패스포트, 여권! 여권 분실이야말로 재앙이다. 여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권이 없이는 한국에서 돈을 송금받을 방법도 없다.

“네가 사고로 경찰서에 온 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사고로 병원에 간 게 아니라 말이야.” 순진하던 소매치기가 점점 강도로 변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믿기로 했다. 얼마나 운이 좋으면 강도가 아니라 소매치기만 당했겠나? 새벽까지 난 수없이 페르난도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가슴에 새겼다. 난 운이 억세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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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가 극성이라 경고문이 어디에나 붙어있다. 경찰서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혼자 여행하는 여자가 주로 타깃이 된다. [사진 박재희]




여행 중 여권을 잃어버려야 한다면 리스본을 추천한다. 믿어도 좋다. 사실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보낸 시간은 체험 여행 프로그램으로 넣어도 이상할 바 없을 만큼 유쾌했다.

리스본 여권 담당관은 내가 평생 만난 모든 공무원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마치 낯선 외지에 처음 온 친구를 소개받은 것처럼 민원인을 대했다. 난 그가 스물한살에 시칠리아에서 소매치기당한 얘기를 들었고, 단수여권 발급신청서를 쓰는 동안 새로운 여행지 세투발(Setubal)을 추천받았다.

때로 한 사람의 친절은 많은 것을 다르게 만든다. 대사관에서 여권 담당자는 리스본에서 당한 소매치기 기억을 지웠다. 여권을 손에 쥐고 나니 소매치기당했을 때의 황당하고 두려웠던 감정이 대부분 사라졌다.

비록 현상수배범처럼 나온 즉석 사진을 붙여야 했지만 새로 받은 임시 단수 여권은 리스본 여행의 가장 특별한 기념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흔해 빠진 마그네틱에 비할 손가? 허리가 휘청하는 값이 들긴 했지만, 여권을 기념품으로 간직하다니 조금 멋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유가 되는 분들께 희귀품 수집으로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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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여권. 외형으로만 보면 일반 여권과 똑같다. [사진 박재희]




“괜찮아. 울지마라. 네가 불쌍한 애한테 준거라고 생각하렴.” 대사관으로 가는 아침 버려진 음식 더미를 뒤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불쑥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에게 돈을 빼앗기고 우는 나를 위로하며 외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다. 사실 칠칠찮은 나는 이번처럼 대놓고 소매치기로 도둑을 맞은 게 아니라 해도 종종 물건을 잘 흘린다. 그럴 때마다 난 할머니를 떠올렸고 언젠가부터 스스로 위로하는 그럴듯한 기원을 만들어냈다.

‘누구든 나보다 잘 쓸 사람, 진짜 필요한 사람 손에 들어가서 잘 쓰이리라!’ 말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기원은 꽤 효과적이라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억울하게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권하는 바이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시라. 정말 효과가 있다.

주황색 불빛에 봤던 그 아이, 내 조카 나이랑 비슷해 보였던 아이를 떠올리며 할머니 말씀처럼 내가 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그 아이와 녀석의 가족이 한두 달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이야, 잘 쓰렴. 너랑 네 가족이 배고프지 않게 잘 지내길 바랄게. 그리고 네가 남의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쉽진 않았지만 조금 큰 소리로 마치 아이가 듣는 것처럼 말해봤다. 기분이 나아졌다. 다른 여행도 아니고 순례길을 걸으러 떠나온 게 아닌가. 괜찮다. 다 괜찮아졌다. 이제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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