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 생존자 이춘식(94)할아버지가 30일 오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소회를 밝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내가, 재판 이겼는데 오늘 나 혼자 나와서 내 마음이 슬퍼. 눈물이 많이 나고 울고 싶어요. 나하고 재판을 넷이 넣었는데 같이 옆에 있었다면, 같이 살아서 왔으면 좋았을텐데….”
30일 오후 2시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원심 판결을 확정하자 소송을 제기한 원고 4명 중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 씨(98)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2005년 처음 소송을 제기한 뒤 이날까지 13년이 흐르는 동안 이 씨와 함께 소송을 제기했던 강제징용 피해자 고 김규수, 여운택, 신천수 씨는 숨졌다. 김 씨는 이 씨와 함께 ‘끝까지 살아서 억울함을 풀자’고 다짐했지만 올 6월 세상을 떠났다. 이 씨는 김 씨가 작고한 사실을 이날 법정에 혼자 들어가면서 알게 됐다.
100세를 바라보는 이 씨는 거동이 불편하고 청력도 안 좋지만 대법원이 선고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 광주에서 서울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선고 1시간 전 대법원에 도착한 이 씨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대법정으로 휠체어를 타고 들어간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는 “(다른 피해자들과) 같이 살아서 왔다면 마음이 안 아픈데, 나 혼자 와서 눈물이 나와 서러와. 안 울라 그랬는데 눈물이 나와”라며 격하게 흐느꼈다.
이 씨와 함께 대법정에서 선고를 들은 김 씨의 부인 최정호 씨(85·여)는 “감회가 깊다. 기왕이면 일찍 좀 서둘러 주셔서 본인이 그렇게 한이 되었던 게 마무리된 것을 봤더라면…. 조금만 일찍, 가시기 전에 판결이 나왔더라면…. 이런 좋은 일을 맞았을 텐데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고교시절이었던 1941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보국대로 동원돼 일본으로 건너가 구 일본제철(신일본제철의 전신)의 가마이시제철소로 강제 동원됐다. 강제동원된 이 씨를 비롯한 한국 청년들은 공장의 기숙사에서 훈련생처럼 같이 살았다. 아침 6시 30분부터 화로에 석탄을 넣고 깨뜨려서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서 석탄 찌꺼기를 제거하는 노역을 했다.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버티지 못해 도주하다 발각되면 구타를 당했다. 일본이 패전하자 이 씨는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이 씨는 77년 만에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됐다. 이 씨는 “일본에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의 만행과 내 어린 시절의 고역을 역시 내 나라의 법원에서 알아줬다”고 말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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