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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재판거래’로 지체된 정의…징용피해자, 하늘서 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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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법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고법 판결 재상고 5년 만에 확정

원고 4명 중 이춘식씨만 생존

홀로 법정 나와 “같이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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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원고들이 구하고 있는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따라서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한 환송 후 원심의 결론은 타당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다수 의견입니다.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13년8개월, 길게는 18년을 끌어온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마지막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30일 강제동원 피해자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가 일본 기업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여씨 등에게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서울고법 판결을 확정했다. 일제강점기 ‘반인도적 불법행위’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적 손해배상청구권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전원합의체가 거듭 ‘타당하다’고 판단한 서울고법 민사19부(당시 재판장 윤성근)의 2013년 7월 판결은, 앞서 2012년 5월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당시 대법관)의 원고승소 취지 판결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대법원이 그렇게 자신이 내린 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는 데 꼬박 6년5개월이 걸린 셈이다. 일본 기업이 서울고법 판결에 불복해 다시 상고를 한 때부터 따져도 5년3개월이 걸렸다.

그사이 소송을 낸 이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이날 재판에는 2005년 2월 소송을 냈던 애초 원고 가운데 이춘식(94)씨만 휠체어를 탄 채 참석했다. 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는 영정사진으로 대법정에 들어왔다. 김씨는 불과 넉달 전인 지난 6월 숨졌다. 같은 내용으로 2000년 5월 소송을 냈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사건까지 포함하면 소송을 낸 징용 피해자 9명 가운데 남은 사람은 이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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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오늘 와 보니까 혼자 있어서 슬프고 초조하다. 울고 싶고 마음이 아프다. 같이했었으면….” 이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 등이 1941~43년 신일본제철 전신인 일본제철의 일본 공장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노역과 멸시의 75년 묵은 한을 풀기엔 판결이 너무 늦었다. 고령의 징용 피해자에게, 지체된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재판은 그저 지연되진 않았다. 그 뒤에 ‘거래’가 있었다. 상고법원 성사에 목을 맸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한-일 관계를 앞세웠던 박근혜 정부 청와대 쪽과 강제징용 배상 소송의 재판을 늦추거나, 대법원 판결의 결론을 뒤집는 방안을 논의해온 정황은 여러 문건과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대법원이 뒤늦게 지난 7월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선고를 서두른 것도 이런 재판거래 의혹에 따른 사법 불신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확정판결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받을 길은 열렸다. 하지만 실제 배상을 받기까지는 쉽지 않다. 당장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의 국내 재산이 적고, 가압류 등 배상을 강제할 방안도 마땅치 않다. 일본 정부와 언론, 해당 기업들은 되레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을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일 관계 등 외교적 파장이 만만찮아 보인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핵심 쟁점인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는지’에 대해, 대법관 7 대 6 의견으로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6명의 소수의견 중에서도 별개의견을 낸 대법관 4명은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다수의견과 궤를 같이했다.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위자료 청구권’이어서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반인도적 불법행위’에서 비롯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대법원 판단은, 강제동원은 물론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다른 ‘반인도적 불법행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전원합의체는 다른 쟁점에 대해선 이견 없이 2012년 대법원 판단을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여씨 등의 패소를 확정한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의 신일본제철이 옛 일본제철을 승계한 회사여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는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은 또 “2005년 2월 소송 제기 때까지도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일본 기업의 청구권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이어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김민경 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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