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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일하는 대학원생은 ‘학생노동자’…제 권리 찾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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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출범 8개월, 대학원생들의 노동조합

‘대학원생이 웬 노조?’ 묻지만

‘일하는 대학원생들’ 숫자 급증

“학생이니까…학생 아니니까”

이중잣대로 학습권, 노동권 침해

연구중심대학 체제의 ‘사각지대’

’대학원생 권리장전’ 운동 이어지며

‘처우개선’ 넘어 ‘권리보장’ 목소리

“교섭대상은 교수 아닌 대학, 정부”

대학원 학생회와 ‘권익’ 공동보조

최근 연구환경 정부 정책 현안으로


▶ 연구 기능이 커진 대학의 대학원들에는 할 일도 많아졌다. 그래서 연구현장에선 대학원생들이 많은 일을 한다. 학생연구원 또는 연구노동자라고도 불리는 ‘일하는 대학원생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미 출범 뒤 8개월을 보낸 대학원생노조의 활동가들에게 다시 ‘대학원생들에게 웬 노동조합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그들의 연구환경에 관해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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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원총학생회장 할 때 대학원생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노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일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대학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22%를 수행하고 대학원생은 연구개발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도 대학원생들이 하는 일은 실제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사람대접도 못 받는 대학원생들이 많기 때문에 학습권,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지난달 23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참고인으로 나온 강태경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수석부지부장(고려대 정치외교학 박사과정·30)은 김성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노조 설립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대학원생들의 연구노동과 행정잡무에 대해 인건비가 정당하게 지급되고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권을 보장해 대학원생들이 일하는 바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평등한 관계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많은 연구기관과 정책 책임자들이 출석한 국정감사장에서 젊은 연구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지난 2월 출범했지만 아직은 이름도 낯선 대학원생노동조합이 정치권과 과학기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자리였다. 노조는 김성수 의원실, 카이스트, 포스텍 등의 대학원생총학생회(원총)들과 함께 이공계 대학원생의 연구노동과 연구환경을 알리는 실태보고서를 냈으며 기자회견도 열어 국회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언론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구슬아 노조 지부장(성균관대 비교문화연구 박사과정·32)은 “값진 활동이었다”고 자평했다.

국정감사 활동이 마무리된 이후인 지난 30일 사무실이 마련된 성균관대 호암관 7층을 찾았다.

대학원생들의 노조, 우리에겐 낯설지만

수없이 받았을 물음을 다시 던졌다. “대학원생이 웬 노조냐는 말을 많이 들을 텐데 어떻게 설명하나요?”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동안 취재를 위해 대학 연구실을 들르다보면 흔히 만나는 대학원생들에선 공부하는 학생보다는 일하는 연구자의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실험실에 속한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생활이나 말투엔 직장인의 면모가 담겨 있다.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아침 정시에 “출근”하고 저녁이나 밤늦게 “퇴근”하며 다른 일이 있을 땐 반일이나 하루 휴가를 낸다. 여름엔 “정기휴가”를 떠난다. 팀 회의에 참여하고 실험실 관리, 행정서류와 보고서 작성 같은 일도 한다. 연구는 팀플레이로 이뤄지고 자신만의 연구 뿐 아니라 외부에서 받아온 프로젝트의 과제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문제는 ‘학생’이자 ‘연구원’이라는 이중적 신분 때문에 대학원생의 연구와 행정 노동이 노동법의 울타리 바깥으로 쉽게 밀려난다는 점이다. 최저시급보다 못한 인건비를 받거나 노동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일이 잦다고 ‘일하는 대학원생들’은 말한다. 강태경 부지부장은 “대학원생노조 출범은 이런 문제의식이 커지고 일하는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노조가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노조 출범의 배경이 될 만한 많은 논의가 대학원생 사회에 있었다.

2014년엔 카이스트 대학원총학생회가 처음으로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제정해 선언했다. 연구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생물학연구정보센터(브릭·BRIC)의 자유게시판에선 대학원생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인권 침해 사례들이 단골로 논의됐는데 특히 대학원생 인건비를 둘러싼 불만은 컸다. 2015년 이른바 ‘인분 교수’ 사건(대학원생에게 교수가 인분을 먹인 사건)은 대학원생 인권 침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2016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학원생 인권장전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대학들에서 권리장전 선언이 줄을 잇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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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2016년 12월 교직원 업무와 다르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대학원생 조교가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동국대 대학원총학생회가 대학 총장과 법인 이사장을 고발한 사건이었다. 구슬아 지부장은 “이후에 동국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울대 등의 대학원생들이 모여 여러 논의를 거쳤고, 지난해 12월에 나온 결론이 노조 결성이었다”고 말했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지난 2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산하 지부로 출범했다. 노조 조합원은 20여개 대학에 걸쳐 있지만, 아직은 숫자가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참여가 활발한 고려대와 성균관대에는 분회가 설립됐다.

강태경 부지부장은 “우리에겐 대학원생 노조가 낯설지만 사실 미국에선 오랜 역사와 안정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국공립대학의 대학원생들은 대부분 노조를 갖추고 있으며, 특히 2016년엔 전미노동관계위원회의 판결로 사립대 대학원생도 노동자로 인정되면서 빠르게 사립대에서도 노조가 생겨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연구중심 대학’ 성장의 그늘

일하는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근래 들어 노동권과 인권의 문제제기가 부쩍 커진 이유는 무얼까? 김해도 한국연구재단 연구정책팀장은 “대학사회 구성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성숙해지면서 오랫동안 관행으로 행해진 부조리를 이젠 버려야 한다는 의식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이강수 생물학연구정보센터(브릭) 실장은 “과학기술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대학원생들의 연구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듯하다”며 “양적 투자나 ‘열정페이’ 등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연구문화에선 질적 성장에 한계가 있기에 대학원생의 처우와 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양적으로 성장해온 ‘연구중심 대학’ 체제에 대학원생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강태경 부지부장은 “20년 동안 대학은 크게 바뀌었다. (대학원이 강화된 연구중심 대학 체제에서) 연구개발 기능이 강화되고 산학협력도 강화됐다. 업무 성격의 일이 크게 늘었다. 새로 생겨나는 업무들의 빈틈을 대학원생들이 메워왔다. 그러면서 갖가지 노동, 인권 문제가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에겐 공부와 연구 외에도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노조에 참여한 김준 서울대 대학원생(생명과학부·26)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실험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연구중심 대학이라기엔 교수가 연구 외에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대학원생이 (교수를 대신해) 과제 제안서부터 과제 수행과 결과 보고서 작성까지 직접 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학이 교수에게 대학원생 교육, 학부생 교육, 행정처리, 학내 회의 참석 등 매우 많은 일을 맡기는데, 이걸 다 할 수 없다 보니 대학원생들에게 연구할 거리를 찾아내고 신입생을 지도하는 일까지 맡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불편한 연구실 문화는 여기에 더해 연구실 생활을 더욱 힘겹게 한다. 한국연구재단이 최근 이공계 석?박사과정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23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를 보면 10%의 대학원생들이 연구실 문화가 불편하다고 답했다. 이들이 꼽은 불편한 연구실 문화를 유형별로 보면 ‘열정페이형’,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파괴형’, ‘무관심과 방임형’, ‘교수재량 남용(불통과 독재)형’, ‘인격무시 강압형’, ‘연구윤리 위반형’, ‘과도한 잡무 요구형’ 등으로 나타났다.

많은 문제의 중심에는 일하는 대학원생들이 받는 인건비가 놓여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22%(4조3000억원)가 대학에서 쓰인다. 대학에서 그 많은 연구개발 실무를 수행하는 이는 대부분이 대학원생들이다. 하지만 대학원생들은 이런 연구노동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적절히 보상받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이스트 대학원총학생회의 한영훈 회장(전산학 박사과정·33)은 “최저시급 인상과 52시간 노동제 실시 이후에 교내 위탁업체들이 물가를 올리고, 소득세율도 오르면서, 대학원생들 사이에선 실질 인건비가 줄었다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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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환경 얼마나 바뀔까

정부는 대학원생들의 연구환경을 개선하는 새 정책을 내놓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7월 과학기술자문회의 의결을 거쳐 학생연구원의 경제적 처우 개선과 행정업무 경감, 인권 보호 강화를 뼈대로 한 새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재흔 과기정통부 연구제도혁신과장은 “지난 20년 동안 대학의 연구개발 기능은 크게 커졌지만 연구행정 체계에선 취약한 면이 남아 있다”면서 “내년 시행을 목표로 여러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부 대책의 중심은 연구행정 시스템을 개선하고 인건비 관리를 체계화하는 데 놓여 있다. 연구실별로 지급되는 대학원생 인건비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학과 차원에서 인건비 재원을 한데 모아 일괄 관리하고 지급하자는 것이다. 이재흔 과장은 “내년에 카이스트 등 과학기술특성화대학 4곳에서 먼저 시행하고 이후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장기적으로 대학이나 기관이 대학원생들과 ‘근로계약’을 정식 체결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아직 가다듬어야 할 부분은 남아 있다. 지난 19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학원생노조와 함께 새로운 인건비 제도에 대해 견해를 밝힌 한영훈 카이스트 원총 회장은 “새로운 인건비 제도의 취지는 긍정적이지만 제도 시행으로 많은 대학원생의 인건비가 사실상 하향평준화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면서 “제도 시행에 앞서 대학의 연구개발비에서 인건비로 쓰이는 비율이 애초에 적정하게 책정됐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흔 과장은 “그런 우려가 생기지 않도록 연구실적에 따라 추가 보상을 하거나 국비 지원을 확대하거나 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건비 제도 개선과 근로계약 도입 검토는 일하는 대학원생들의 사회에 또다른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한영훈 카이스트 원총 회장은 “노조와 원총은 협력의 관계”라며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근로계약 제도가 도입되고 학생회와는 다른 조직의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지면 카이스트 같은 곳에도 노조 분회가 생겨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내다봤다. 노조의 활동 계획과 관련해, 구슬아 지부장은 “단체교섭권을 지닌 우리 노조의 교섭 대상은 교수가 아니라 대학, 연구재단, 정부 등”이라며 “하지만 당분간은 대학원생 권익과 관련한 일반 이슈를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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