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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만물상] 수능 만점 취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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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병의 하루는 고달프다.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아직 잠들어 있는 동료 병사의 아침을 짓고 찬을 만든다. 다른 병사가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취사병에겐 설거지와 뒷정리가 남는다. 하루 세 끼 식사는 주말과 휴일에도 어김이 없다. 다른 병사가 쉬는 날 일하는 게 더 힘들다. 지난여름 아들을 취사병으로 보낸 어머니는 첫 외출 나온 아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습진이 도진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수백명분 밥을 하느라 대형 조리도구를 삽질하듯 다뤄야 하니 도리가 없다.

▶취사병을 육·해군에선 조리병, 공군은 급양병이라 부른다. '불수능'으로 소문난 이번 수능에서 공군 급양병이 만점을 받았다. 지난 5월 입대한 김형태 일병이다. 7월에 자대 배치를 받아 일을 배우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수능 만점'이라니 옛날 군대를 겪은 세대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공부할 시간을 확보했을까 싶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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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중대급마다 PC를 이용할 수 있는 사이버 지식정보방이 있다. 병사들이 머무는 생활관 안에 여덟 명당 한 대꼴로 컴퓨터를 갖췄다. 일과 후 밤 10시까지는 인터넷 강의도 들을 수 있다. 부대장 재량에 따라 취침 소등 뒤 한두 시간 더 이용해도 된다. 김 일병도 지식정보방에서 EBS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세 끼 사이로 자투리 시간을 아껴 책을 읽고 저녁엔 열람실에서 공부했다. 일과 후에도 툭하면 고참에게 불려갔던 예전과는 딴판이다.

▶2014년 윤 일병 구타 사망사건을 계기로 사병의 병영 생활과 복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군대가 많이 달라졌다. 월급도 오르고 수신용 휴대전화도 구비됐다. 간부들이 일과가 끝난 뒤 그리고 휴일에는 병영생활관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도록 '간부 수칙'도 준비 중이다. 지휘관이 병사의 생활 모습을 찍어 부모가 만든 단체 카톡방에 띄워 주는 부대도 많다. 부모가 지휘관과 카톡방에서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식 안부를 물을 정도다.

▶'군대 가서 모바일로 학점 따고, 자격증 따자'는 구두선이 아니라 현실이다. 육군은 지난 7월 병사들이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듣고 학점과 자격증을 취득하는 '육군 Dream, 청년 드림' 프로젝트를 내놨다. 군대를 청춘들이 시간 허비하는 곳이 아니라 인생을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검정고시와 독학사(獨學士) 학위부터 국가자격증 취득에 외국어 교육까지 지원한다. 김 일병 수능 만점은 그렇게 달라진 군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기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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