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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검사가 말했다 “피고인 전원 공소기각 판결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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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제주 4·3 수형인 재심 공판

48~49년 억울하게 징역 산

제주 4·3 수형인 중 생존자 18명

5차례 심문 끝 재심 개시 결정

‘진짜 재판’ 받을 수 있게 돼

10월~12월 네번의 공판 열려

검찰 결국 공소사실 특정 못해

“공소기각 판결 내려달라

아픔 치유될 수 있기를 기원”

1월17일 선고에서 공소기각될 듯

“억울한 한 씻어줘 감사하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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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지난 9월3일 제주 4·3 수형인 중 생존자 18명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0월29일부터 12월17일까지 네 차례 공판이 열렸습니다. 재판으로 볼 수도 없는 허술한 군사재판으로 징역을 살았던 4·3 수형인들은 이번엔 제대로 된 법정에서 변호인과 함께 “죄가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2019년 1월17일 1심 선고를 앞두고 네 번의 재판을 돌아봅니다.

“김경인씨. 김순화 할머니 오셨어요? 김평국 할머니 오셨어요?” “손들면 되나요?”

“손들면 됩니다. 박내은 할머니 오셨어요? 박동수 할아버지 오셨어요?” “예!”

“박순석 할머니 오셨어요?” “못 오셨습니다.” “부원휴 할아버지 오셨습니까. 양일화 할아버지 오셨습니까.” “네.”

“양근방 할아버지 오셨어요? 오계춘 할아버지? 오영종 할아버지? 오희춘 할머니? 임창의 할머니 오셨어요?”

임창의씨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판장인 제갈창 부장판사는 “일어서실 필요 없다. 손만 드셔도 된다”고 말했다. “정기성 할아버지?” “못 오셨어요.” “몸이 안 좋으시다고 했죠. 조병태 할아버지? 한신화 할머니 오셨나요? 현우룡 할아버지 오셨나요? 현창용 할아버지 오셨나요?”

지난 10월29일 제주지법 형사2부는 제주 4·3 수형인 18명의 재심 사건 첫 공판을 열었다. 피고인은 형사재판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박순석, 정기성씨는 이날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85~97살인 수형인들은 조금씩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피고인’의 출석을 확인하는 절차가 끝나자 재판장이 말했다. “피고인들은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어 개개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법정에서는 불리한 진술도 다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피고인들 보호를 위해서 법률이 진술거부권을 보장하고 있어요. 본인에게 유리한 사정은 언제든지 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술거부권은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피고인의 권리로 재판장이 반드시 알려줘야 한다. 수형인들이 받았던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과는 다른 ‘진짜 재판’이 70년 만에 다시 열린 것이다.

구금과 재판 기록조차 사라져

‘4·3 수형인’들은 제주 4·3항쟁 때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1948년 12월 내란죄, 1949년 7월 국방경비법의 적에 대한 구원통신 연락·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이 집행되거나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이다.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으로 나오지만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들 중 생존자 18명이 2017년 4월19일 처음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2월부터 5차례 4·3 수형인들의 심문기일을 갖고 9월3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공소장, 판결문 등의 기록이 없었지만 재판부는 “재심 청구인들에 대한 ‘사법기관의 판단’이 있었고 그에 의해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며 재심의 전제인 ‘유죄의 확정판결’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수형인명부, 합법적인 체포·구금 자료가 없다는 점과 수형인들의 법정 진술이 “내용이 구체적이고 주요한 면에서 일관되며, 꾸미거나 과장한다는 느낌이 없어 진솔하고 자연스러워 신빙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재심 사유인 불법구금·고문을 인정했다. 검찰은 기록이 없다는 책임을 수형인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항고를 포기해 재심 개시 결정은 확정됐다.

재심 개시 사유가 있는지는 재심 청구인들이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재심 개시 결정으로 기존의 유죄 확정판결은 무효가 됐다. 이날부터 시작된 정식 형사재판에서는 다른 형사 재판과 마찬가지로 검찰이 특정한 공소사실(범죄 요건을 충족하는 특정한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재판부도 “첫 번째 쟁점은 공소사실이 무엇인가다. 재심 청구인들도 내가 뭘 잘못했길래 벌을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두 번째, 공소사실이 특정되면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첫 번째 단계를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정광병 제주지검 검사가 공소사실을 읽는 모두진술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주 4·3 첫 재심 재판에 공판검사로 관여하게 돼 개인적으로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검찰 역시 이번 재판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재판 진행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70년 만에 열리는 역사적인 재심 재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일생 동안 재판다운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혀 정당한 재판을 받고자 희망했던 재심 청구인들 바람과도 어긋나는 것일 것이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1948~1949년 군사재판 당시의 공소사실을 검찰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정 검사는 이들을 처벌한 근거인 옛 형법 제77조 내란죄, 국방경비법 제32조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죄, 제33조 간첩죄의 법 조항을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1948년 군사재판을 받은 10명은 1948년 4월~11월 사이 제주도 일원에서 불상자들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거나 기타 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했습니다. 1949년 군사재판을 받은 8명은 1948년 4월~1949년 6월 사이 제주도 일원에서 직접, 간접으로 무기, 탄약, 양식, 금전 기타 물자로써 적을 구원 혹은 구원을 기도하거나 또는 고의로 적을 은닉 혹은 보호하거나 또는 적과 통신 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또는 대한민국 군대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 잠복 또는 행동했습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검찰은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아는 재심 청구인들의 피고인 신문을 통해 공소사실을 특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형인들을 변호한 김세은 변호사는 “피고인 진술로 공소사실을 특정한다는 것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전혀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공소사실은 검사가 특정해야 하고, 특정하기 어렵다면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 규정을 위반해 무효이므로 법원은 공소기각 판결을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 검사는 “유죄를 고려하는 게 절대 아니다”라며 “검찰도 최대한 공소사실 특정을 위해 노력한 뒤 법원 판단을 받으면 피고인도 정당한 재판을 받았다고 느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연로해 재판이 길어지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다른 재판의 자료로 쓰일 수 있고 피고인에게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진행에 차질 없게 검찰 측에 기회를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피고인 신문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매만 맞았다”

피고인 신문은 지난달 26일부터 이틀 동안 진행됐다. 하지만 처음 진행된 김평국씨의 피고인 신문부터 쉽지 않았다.

“경찰이 매질하고 때리면서 물어본 거 기억나세요? 남로당이나 무장대를 위해서 망을 본 적이 있느냐, 돈이나 식량, 정보를 제공한 적 있느냐 물어보지 않았나요?”(정 검사)

“물어보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 답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만 맞았죠.”(김평국씨)

“경찰이 물어본 것을 토대로 공소사실이 구성됐을 것 같은데 뭔가 더 기억나세요?”

“나는 한 게 없으니까 기억도 안 나고 매가 아프니까 다 잊어버리고….”

“모르겠다고 대답했어요? 더 말한 건 없어요?”

“네. 때리기만 하니까….”

“재판받을 때 더 기억나는 거 없어요?”

“아무것도 물어보질 않았는데.”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들인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분 있어요? 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김달삼, 김대진, 이덕구, 이좌구, 김두봉, 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김완배, 현복유, 김은한, 김석환, 김귀환, 김대진, 고진희.”

“이름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덕구라는 사람은 목을 잘라다가 관덕정에 매달았다는 소문은 있었는데….”

“남로당에 가입한 적 없나요?”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영문도 모른 채 맞아서 억울했습니다.”

“무장대 도와준 적도 없어요?”

“없어요.”

지난 3월19일 심문기일 때는 잘 답변했던 현창용씨는 그새 더 건강이 나빠졌다. “경찰이 잡아가서 뭐 물어봤는지 기억나세요?”, “폭도와 연락했냐, 삐라를 뿌렸냐, 집회를 했느냐 같은 질문 들어본 적 있으세요?”, “대답하신 거 있으세요?” 현씨는 검사의 질문을 알아듣고 답할 여력이 없었고, 피고인 신문은 중단됐다.

1949년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들의 피고인 신문이 열린 지난달 27일 재판도 상황은 비슷했다. 검찰의 피고인 신문이 계속될수록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잡혀가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받았던 수형인들의 처지만 재차 확인됐다.

“증언 자료집을 보니 조사받을 때 내란죄, 폭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요.”

“네. 내란죄, 폭동죄라고 했는데 저는 내란이 뭔지 폭동이 뭔지 모르니까.”(양근방씨)

“왜 맞았던 거예요?”

“형들이 총에 맞아 죽었으니까 같은 혐의가 있는 게 아니냐면서….”

“형들 혐의가 뭔가요?”

“소개령에 따라 밑으로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을 다 폭도로 간주해서 죽였죠.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산사람(무장대)의 강요에 의해서든 망을 봐주거나 물건을 제공하거나 쌀을 제공한 적 없어요?”

“네.”

“재판에서 누가 말한 기억도 없고요?”

“네.”

피고인 신문을 바탕으로 검찰은 지난 11일 법원에 공소장 변경을 허가해달라고 신청했다. 검찰이 새로 허가를 신청한 공소장에는 피고인별로 공소사실이 적혀 있었지만 여전히 법조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첫 공소사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지난 17일 열린 결심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은 원래 공소사실이 뭔지조차 모른다. 따라서 원래 공소사실을 전제로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 하는 공소장 변경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검찰이 변경하겠다고 제출한 내용을 원래의 공소사실을 복원한 것으로 보겠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4차례 열린 공판의 마지막 순간은 정 검사의 구형으로 시작됐다. “전에 몰랐던 4·3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제주도민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지금까지 알고 배웠던 것과는 또 다른 진실의 일면이었습니다. 4·3 사건에 대한 이념적 논란을 떠나 해방 직후 혼란기에서 예기치 않게 운명을 달리한 수많은 제주도민과 그들을 말없이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아물지 않은 아픔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쓰라린 마음의 아픔 나아가 역사와 민족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하고 그때의 진실을 최대한 밝혀보고자 하는 진심으로 지난 1년여간의 재판에 임해왔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몸과 마음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버텨낸 여기 모든 분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수형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 정 검사는 “피고인들 전원에 대하여 공소기각(형사소송에서 소송조건에 흠결이 있을 때 법원이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 판결을 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임재성 변호사도 “피고인들에게 공소기각 또는 무죄의 판결을 내려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고, 재판 과정은 차마 재판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미흡한 절차였습니다. 형무소에서 한 억울한 옥살이는 법에 의한 처형이었습니다. 48년 12월 선고된 10건, 49년 7월 선고된 8건의 유죄 판결은 문명국가의 사법절차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도 지키지 않은 채 민간인들을 적으로 몰아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재판을 활용했던 것이었습니다. 재판부가 18명 모두 남은 생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내 몸에 꽉 묶였던 것이 조금 녹아”

요양병원에 있어 공판에 나오지 못했던 정기성씨를 제외하고 이날 재판에 나온 수형인 17명 중 6명은 마지막 진술을 했다.

“70년 전 억울한 한을 씻어줘 정말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박동수씨)

“죄가 없는데 교도소 갔다 오니 죄인으로 보는 게 제일 억울합니다.”(임창의씨)

“개돼지도 그렇게 취급을 안 하는데 사람을 어찌 그렇게 합니까. 너무 고생을 많이 해 억울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현우룡씨)

“이 한을 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부원휴씨)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물어보면 재판받는다는 소리를 못하고 놀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심받을 때는 내 몸에 꽉 묶였던 것이 조금 녹았어요. 우리 자손들한테 할머니가 전과 있고 형무소 살았다는 기록이 없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김평국씨)

“우리가 걸어온 역사가 너무나 험해서 힘들게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18명이 바라는 것은 무죄를 해줬으면 하는….”(양근방씨)

모두의 말이 끝난 뒤 재판부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며 “재판을 마치고 선고 기일은 2019년 1월17일로 지정하겠다”고 말했다. 공소사실이 복원되지 못한 만큼 재판부는 검사와 변호인이 공통되게 요청한 ‘공소기각 판결’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으면 이 판결은 선고일로부터 7일이 지나면 확정된다. 70년 동안의 ‘억울한 한’이 비로소 풀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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