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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여섬이 지척이다.
● 걷는다는 것은 도착지가 아니라 과정을 걷는 것
길은 가막골 전망대를 지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여섬은 지척이다. 어쩌면 헤엄을 쳐서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작은 폭의 바다가 섬과 육지를 구분 짓고 있었다.
전망대를 떠난 길은 다시 오솔길로 이어진다.
길이 가팔라지면 사람들은 걷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뒤편에는 언제나 약간의 육체적 고달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른 무엇에 집중할 틈도 없다. 다만 자신의 발밑만 열심히 바라보며 걷는 것만이 어쩌면 당면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지만을 생각하며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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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오르고 내리는 그 불연속성이 묘미라면 묘미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평탄한 길이 주는 안온함이 걷는 행위와 더불어 주변의 풍경이나 내 안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르고 내리는 길의 변화가 있어야 길은 길다워지고, 걷는 이도 덩달아 다양성과 변화라는 길의 여러 얼굴과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을 걷는다는 것은 가끔은 성취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해송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 그러한 즐거움에 부합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몸을 괴롭히면서 얻어지는 즐거움도 있기 마련이다. 땀은 노력과 성취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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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걸으며 목적지만을 생각하며 무심코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렇게 길이 건네는 다양한 이야기와 느낌, 그리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아우성이며, 그들이 건네는 이런저런 소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걷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노라면 왜 굳이 힘들여 먼 이곳까지 걸으러 왔는지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운동이라면 가까운 곳에서 걸어도 충분한 걸 구태여 먼 길을 달려올 필요조차 없을 텐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과 중심의 경쟁 사회에 익숙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며, 그 과정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세상과의 반가운 조우이면서, 그 조우를 통해 나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행위임에도 숙제하듯 걷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순례자>에서 코엘료는 '오직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망만이 앞섰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움직이는 과정을 놓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랬던 것이다. 삶의 진실은 과정 속에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삶에서도, 길 위에서도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는 것만이 승리이고 성공이라고 여기며 그렇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저당 잡힌 채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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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느 순간, 길마저도 정복의 대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길을 알기 위해, 그 길 위의 나를 알기 위해 걸어야 하는 걸음걸음이었음을 잊었던 것이다. 많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내가 어느 길 위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수많은 작은 경험과 느낌들이 자랑이 되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딱히 쓰임새는 불명확하지만 유명한 제품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명품이라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수많은 물건들처럼, 길도 수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잘 사는 삶이란 사다리의 끝을 먼저 밟는다거나, 모두가 탐내는 물건의 소유나 소장품의 화려한 목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도 괜찮을 만큼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그 사실을 체화(體化)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어쩌면 물신(物神)의 사회에 살면서 물신을 배역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소비라는 물질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 조금씩 발을 빼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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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천명(知天命)을 생각하다.
나잇값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을 먹은 만큼 그 값어치를 하라는 말일 게다. 물론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나이도 아니건만, 세상은, 또 내 스스로는 나이라는 무게 앞에서 그 값을 따지게 된다. 나 역시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이다. 지천명(知天命)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께서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五十而知天命)'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로서는 워낙 까마득하게 높은 경지인지라 하늘의 뜻을 논할 계제야 못되지만, 굳이 지천명을 이야기하자면, 어쩌면 운명으로 정해진 삶의 이치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커다란 꿈이 없이도 작은 것에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는 나이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렇게 살고 싶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할 것도 같다.
그러고 보면 지천명은 '소유보다는 마음의 크기를 키움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던 누군가의 충고를 실행해야 할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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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육체에 머무는 여행과 같다고 했었다. 여행자에게 무거운 짐이야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단출한 걸망 하나만으로 세상을 주유할 수야 없겠지만, 되도록 가벼워도 괜찮을 것이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어깨만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도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우고,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세울 결심을 한다. 나 아니면 누가 그것을 해줄 것인가. 어쩌면 나이 50에는 조금 더 당당해져도 괜찮을 것이다. 당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지혜와 배움의 기회에 감사해야 하며, 나아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용기를 장착하고, 세상 속으로 기꺼이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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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 말기에 이탁오(李卓吾)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이 50 이전까지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 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 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라고 썼다.
이탁오가 아무런 생각 없이 다른 개가 짖으니 따라 짖었다는 대상은 당시의 체제 이념이자 생활 규범이었던 주자학이라는 유학에 관한 것이었다. 유학이라는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는 자책이었던 셈이다. 그는 결국 유학의 도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했다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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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굳이 유학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이 맹종하고 있는 사상이나 가치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자신이나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를 따져본 그가, 나이 50이라는 숫자 앞에서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또 수많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는지... 내가 아닌 세상이 규정해 준 틀 안에서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그렇게만 살면 잘 사는 것인 양 착각하며,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구호 아래 정작은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길 위에서 자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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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삶의 여정에서, 또 이런저런 길 위에서는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하던 청맹과니 신세였던 것이, 조그만 이익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기껏 세상사는 요령을 두고 대단한 실력인 양 우쭐대고, 남들보다 앞서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뒤질 수도 없는 경쟁의 굴레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아왔던 날들... 그렇게 곁눈질할 수 없게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무조건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규칙 아닌 규칙에 저당 잡힌 채로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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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하고, 꿈꾸고, 걸으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이 50에 즈음해 이제는 최소한 눈가리개 밖의 세상을 궁금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옆에도 뒤에도 풍경은 있었으며, 보고 듣고 느껴야 할 것들은 세상에도 길 위에도 널려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만큼은 어쩌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결승선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승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실상 조금 늦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다만 길 위에서건 인생길에서건 너무 빠르게도, 또 너무 느리게도 걷지 말아야 할 것이며, 길의 법칙과 요구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속도를 인식하고, 길 위에서의 관점과 하고자 하는 바를 잊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인생이 고달프면 걸으라고 했다. 그것이 광활한 대지의 길이건, 인생길이건, 그냥 무심히 마음을 열고 걸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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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름도 생소한 붉은앙뗑이를 지난다. '앙뗑이'는 이 지방 고유의 말로, '경사가 급한 길'을 의미한단다. 그래서일까. 다시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한다.
걷는 이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행동하고, 꿈꾸고, 걸으므로 살아 있는 것'이라 했다. 그에게 있어 걷는 사람은 왕이다. '좀 더 잘 살기 위해서 조립식 소파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이 그가 정의하는 왕이다. 그는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제약과 두려움에서 자신의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어서 걷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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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걷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새롭게 만나는 세상과 경험을 통해 더 많이 '알기 위해' 걸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그가 아니라도 누구든 걷고자 하는 이의 걷는 이유와 걷기를 위한 계획은 대부분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를 떠나게 부추긴 것은 우선 너무 오랫동안 얌전히 생활하면서 억눌러온 모험에 대한 갈증이었다'고.... 그래서 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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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삼형제섬이 보인다. 삼형제섬은 보는 위치에 따라 두형제섬이기도 하고, 삼형제섬이기도 하단다. 길 위에서 바라보는 삼형제섬은 두형제섬이다. 아무래도 막내는 형들 뒤에 숨었나 보다.
이제는 가야 할 길이 머지 않았나보다. 이정표는 만대항이 지척임을 일깨워 준다.
바다 위를 가르는 나무데크를 걸으며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늘도 수고했다고... 하지만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어쩌면 더 멀고 더 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토닥토닥 절벽을 두드리는 파도의 소리가 마치 내 어깨를 두드리는 양, 작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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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티베트 불교의 성자인 밀레르파의 조언이 떠오른다.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가 신성(神性)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삶이 나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어디에서 찾을까'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만약에 내 안에 신성(神性)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신성을 깨닫는 과정이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퍼뜩 하게 된다.
만대항에는 조업을 끝낸 배들이 지친 몸을 쉬느라 기척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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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 솔향기길 1코스
꾸지나무골해수욕장 → 1.26km → 큰어리골 → 2.2km → 용난굴 → 1.41km → 여섬해변 → 0.93km → 가마봉전망대 → 1.64km → 당봉전망대 → 0.53km → 붉은앙뗑이 → 1.93km → 만대항 (전체 10km 남짓)
● 태안 솔향기길 1코스 가는 길
대중교통(원점 회귀시) – 하루 7차례 마을버스 운행. 버스 간격은 2시간~2시간30분 간격이므로 버스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함. (부도경로당 – 만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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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 국민청원, 1만 개당 2개꼴로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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