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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때리고 욕해야? 원치 않은 인사이동도 갑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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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시아경제 DB


[아시아경제 황효원 기자] #2018년 한 중견기업에 입사한 이모(29)씨는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안돼 부서 이동 통보를 받았다. 이씨가 업적을 낸 뚜렷한 결과가 있음에도 윗선에선 '실적 부족에 따른 인사이동'라는 이유로 그의 발령을 촉구할 뿐이었다. 이씨는 객관적인 자료를 입증하며 합당한 인사이동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자료 준비에 따른 시간이 소요돼 불가능하다며 '윗선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씨는 "오너 갑질이 단지 때리고 욕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본다. 본인들의 필요에 따라 누명을 씌우고 자진 퇴사를 요구하는 것도 직장 갑질"라고 토로했다. 1년간 2번의 부서 이동을 전전하던 이씨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사를 결심했다.

이씨와 같이 원치 않은 인사이동에 따른 직장인들의 스트레스가 적잖다. 직장 갑질 119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2018년 대한민국 직장 갑질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 갑질 수준은 평균 35점(100점 만점)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기업 100곳 중에서 35곳에서 '직장 갑질'이 만연한 것이다. 지난해 '직장갑질 119'에 따르면 상사의 흰머리 뽑기, 중국집 회식에서 여직원들이 자장면을 먹고 난 그릇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게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 집안일을 맡겼다고 폭로하는 사례가 쏟아졌다. 직장인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갑질'을 해외 언론에서 'Gapjil'로 표기했을 정도다. 작년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투척' 사건을 시작으로 한진 일가의 갑질 행태가 연이어 알려졌고, 최근 양진호 한국 미래기술 회장의 직원 폭행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갑질'의 주요 원인으로 개개인의 비뚤어진 성격 외에 고질적인 상명하복의 조직문화, 부의 양극화, 물질 만능주의 등이 꼽혔다.

이에 정부는 개정된 근로기준법엔 '직장 내 갑질'을 지위를 이용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비영리단체 '직장 갑질 119'는 어떤 행위가 갑질인지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는 '직장갑질 예방 매뉴얼'을 발표했다. 그간 축적된 사례 2만5000건을 토대로 노동부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만들었다. 오는 7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 전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보다 한발 앞서 매뉴얼을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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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직장 갑질' 개선에 나섰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문제는 오는 7월 시행을 앞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직접 처벌 조항이 없어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또 이씨의 사례처럼 '부당인사'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23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전직하지 못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정당한 이유'를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린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항목에 '사용자의 업무변경을 따른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고 직무 재배치의 범위를 폭넓게 설정하고 있어 사실상 부당 인사이동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사실상 직장 내 괴롭힘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은 마련됐지만 이를 입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가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조항이 없는 데다가 대부분 교묘하게 이뤄지는 언어폭력이나 성희롱 등을 피해자가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 또 괴롭힘의 기준도 모호해 자칫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실효성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다만 원치 않은 부서에 배치된 뒤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공무원에 대해 법원은 순직을 인정한 사례도 있었다. 20년 넘게 기자로 근무하다 PD로 보직이 바뀐 뒤 사망한 방송국 직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지난 1990년 한 방송국에 입사해 보도직군 기자 및 지방방송국 관리직으로 근무하다 2013년 6월 본사 편성제작국 라디오 편성부 PD로 발령하는 전씨는 2015년 2월 업무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구토하며 기절, 병원으로 이송 중 숨졌다.

당시 유족은 전씨가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로 사망했다며 유족급여 등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 측은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누적으로 지병인 고지혈증이 급격히 악화돼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며 사망과 업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직장갑질 119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산재 인정 법위를 넓혀 직장 갑질을 줄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기존 근기법이 간접·특수고용 노동자에게 법 적용이 어려웠는데 이번 개정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줄어든 근무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라며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법이 시행되기 전 지청마다 '직장 내 괴롭힘 전담 부서'를 둬 예방과 조사, 근로감독을 집중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황효원 기자 wonii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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