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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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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의형제 맺은 건달, '왕의 안녕'에 헌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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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남인의 목숨 건 암투 속 송시열·윤휴 등 사대부 갈등 그려

가소로운 언변의 벼슬아치와 가짜 선비들 향한 혐오 담아

조선일보

왕은 안녕하시다

성석제 지음|문학동네|전 2권|각 권 1만4500원

동인문학상(2002년) 수상 작가 성석제가 5년 만에 새로 낸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는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200자 원고지 3000장이 넘는 분량에 걸맞게 내용과 구성도 복합적이다. 우선 분명한 것은 조선 숙종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라는 점이다.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기록에 충실하게 군주와 신하가 주고받는 대화를 묘사했다. 숙종은 열네 살에 즉위해 46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왕권(王權)을 지키기 위해 신권(臣權) 세력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유도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이 소설은 그 과정에 담긴 암투를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정치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숙종 시대는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史劇)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이 소설은 그 사건을 다루되 약방의 감초 정도로 여겼다. 작가는 장희빈보다 송시열, 윤휴, 김만중, 박태보 등 각자 신념을 추구했던 실존 사대부들의 발언과 행동을 재현하는 데 더 주력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역사 기록에 붙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 설정은 사실에 전혀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분방하다. 숙종이 세자 시절에 우연히 만난 건달 청년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상황 설정에서 출발한 것. 기생 할머니 밑에서 자라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로 이름 높은 '성형(成衡)'이란 인물이 소설의 화자 '나'로 등장한다. 작가는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3인칭 객관적 시점에서만 썼을 텐데, 1인칭으로 쓴 역사소설은 아마 처음이 아닐까"라며 빙긋 웃었다. 정사(正史)를 엄숙하게 다루되, 현대인의 관점에서 풍자도 섞겠다는 작가의 의도 때문에 독자를 대신해서 역사의 현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달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일보

소설가 성석제는 "숙종보다는 왕을 둘러싼 실존 인물들의 가치관과 행동이 지금보다 더 정확하고 올곧아서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더 주목해서 썼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역사소설을 표방한 건달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역사 리포터이자, 역사의 결정적 계기에 개입하는 참여자이기도 하다. 숙종이 열네 살에 즉위하자 '나'는 왕명을 몰래 받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숙종은 '나'에게 권좌에 앉음으로써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한다. '나'는 어린 임금의 눈물을 딱하게 여겨 '왕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다. 어린 왕은 "할바마마가 송시열에게 줬다는 밀서를 찾아서 남몰래 갖고 오라"고 '나'에게 명하는 것을 비롯해 실록에 남아 있지 않은 임무를 맡긴다.

이 소설은 액자소설 구조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건달 '나'의 회고록에 바탕을 두고 그 필사본이 대대로 전해지면서 첨삭이 덧붙여진 가운데 어느 날 현대의 작가 '나'가 그 복사본을 발견했고, 부분적으로 손을 보면서 성석제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가 탄생한 것. 이 소설은 그런 도입부를 거친 뒤 숙종 시대의 한양으로 뛰어든다. 건달 주인공의 시선으로 당시 도성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머리를 빗어 상투를 올리고 망건에 갓 쓰고 도포 입은 뒤 집이 있는 향교동의 미로와 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쳐나오니 어영청 앞에 군사들이 어슬렁대고 있다.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연화방으로 걸음을 옮기면 밥 한 그릇 천천히 먹을 시간에 숭교방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반촌을 지나 성균관 뒤 송동에 우암이 한양에서 머무는 집 경저(京邸)가 있었다'는 식이다.

이 소설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남인으로 정권이 바뀌던 과정에 목숨을 걸고 활동한 인물들의 생각과 언어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당시 궁중 어법에 충실하게 대화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사건들 사이의 빈틈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면서 건달 주인공 '나'의 활약이 등장할 때 서술 어법은 현대소설의 문체를 취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외교 관계에 개입해 조선의 생존에 공을 세웠을 이름 없는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역사 상상력이 소설 언어를 통해 전개되기도 한다. 작가는 숙종 시대를 돌이켜보면서 '가소로운 언변과 재주로 남을 현혹하고 스스로를 최고라 자부하는 벼슬아치와 가짜 선비'들을 향한 혐오를 소설에 담았다. 숙종이 '왕의 안녕=조선의 안녕'을 위해 정쟁을 유도한 게 불가피했다는 생각도 깔아놓은 것이다.

작가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무대로는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어울린다고 하듯이, 숙종 때는 역사소설을 쓰기에 좋다"며 "정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재해도 많아 백성이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화폐경제와 무역이 발달하면서 사회 변화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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