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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라이프]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 내변산(內邊山)을 걷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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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소폭포가 아스라이 눈을 맞고 있다.

떨어져 내려도 희망이다
절망의 힘도 이렇게 크면 희망이 된다
비명도 없이 곤두박질 치다보면
딛고 섰던 땅까지 움푹 파지지만
그보다 더 세찬 무엇이
생명을 받들고 위로 솟구치고야 만다
수직의 절망이 수평의 희망으로
튕겨 흐르는 숨막힘
- 고옥주,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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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소폭포에서 매창(梅窓)을 생각하다.

눈앞에 폭포가 있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어서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눈 덮인 언 땅 너머로 나아가고 싶지만 길은 눈 속에 갇힌 지 오래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만 멀리에서 바라본 폭포는 눈과 얼음에 갇혀 과거의 그 웅장한 포효를 잊어버린 듯 고요했고, 실상 그 물줄기도 산이 겨우내 품었던 물을 아끼듯 조금씩만 풀어내는지라 여리고 아스라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연속의 흐름은 비록 계절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질기게 낙하의 꿈을 꾼다.

직소폭포(直沼瀑布)는 약 30m 정도의 높이에서 폭포를 떠안고 있는 둥근 못(沼)으로 물줄기가 곧바로(直) 떨어진다고 하여 직소(直沼)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억겁의 세월 동안 낙하하는 폭포를 담아낸 이 소를 실상용추(實相龍湫)라 하는데, 이곳에서 발원한 물이 제2, 제3의 폭포를 이루며 흘러 분옥담, 선녀탕 등의 경관을 이루니, 이를 봉래구곡이라 한다. 이제껏 지나온 계곡들이 그 봉래구곡이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아름다웠던 계곡마저도 설경이 가리고 있었던지라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나왔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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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폭포를 마주보고 서 있는 낙락장송(?) 한 그루. 오랜 세월 폭포를 바라본 소회 하나쯤은 들려줄 만도 한데 그저 묵묵하다. 여행자의 재촉의 눈길이 부담스러웠음인지 고개를 외로 돌려 가만히 눈 덮인 산자락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면 혹여 이 소나무는 매창이 폭포에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던 모습을 기억은 하고 있을까.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 시조의 작자인 매창(梅窓)이 바로 부안 사람이다. 매창은 부안의 명기(名妓)로, 19세 때에 46세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들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신분적 동질감과 시(詩)라는 문학적 교류를 통해 그들만의 사랑을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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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이할꼬. 인생사 무상이고, 사랑마저도 그러한 것을...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으나,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회자별리(會者別離)의 아픔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남는 것은 눈물이요, 가슴을 저미는 절절한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 유희경이 면천(免賤)하여 서울로 떠나자, 부안에 홀로 남은 매창은 그 안타까운 그리움을 시로 달래니, 그녀의 마음이 오롯이 새겨진 시가 바로 '이화우 흩뿌릴제'라는 절창이다.

그 놈의 인연이 무엇이건대, 매창은 평생 그를 그리워하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매창은 1610년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부안에 묻혔고, 후에 그녀의 무덤은 '매창이뜸'이라 불리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부안의 명소가 되고 있다.
(*서울로 떠난 지 15년이 지난 후 유희경은 부안에 와 보름 정도 머물며 매창과의 짧은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 짧은 만남 이후 매창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일까. 송도에 박연폭포, 황진이, 서경덕을 일컫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이 있듯, 부안에도 '부안삼절(扶安三絶)'이 있었으니, 직소폭포와 이매창, 유희경이 그 주인공이다. 무릇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당사자들에게는 애간장을 끊는 아픔일진데, 보는 이에겐 비련에 비길만한 사랑이 없음인지, 굳이 이름까지 붙여 이를 기억한다. 매정한(?) 세상사의 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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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떠난 길은 주상절리(柱狀節理)의 절벽을 에돌아 이어진다.

직소폭포 주변의 암반은 화산지역의 특성을 이루는데, 화산폭발로 쏟아져 나온 여러 암석들이 퇴적된 뒤 빠르게 냉각되거나 수축되면서 만들어진다는 주상절리가 그것이다. 주상절리는 기둥모양의 돌들이 다발로 엮어있는 듯한 모습의 지형을 말한다. 직소폭포 역시 주상절리 폭포라고 한다. 그래서 하늘에 뚝~ 떨어지듯이 물줄기가 바로 소로 내리꽂히는 형태의 폭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막의 가파른 길은 깎아지른 듯 주상절리의 절벽 아래로 이어진다. 주상절리 각각의 돌기둥들이 스르륵 길 위로 미끄러져 내리기라도 하는 양 아슬아슬하다. 또 그만큼 절벽을 이루는 세로의 선들이 신기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무늬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웅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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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를 병풍 삼아 오르는 길은 간만에 만나는 오르막인지라, 조심스럽기만 하던 발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걸음은 꾹꾹 눌러 밟는 만큼씩만 나아간다. 힘겹고 계단을 오르고, 계단을 지나면 길은 절벽 아래로 이어진다. 길은 까마득한 절벽에 선반 같이 매달려 있는 잔도(棧道)를 지나는 양 조금은 아슬아슬하다. 길 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내변산이 비록 야트막한 산들이지만 그 산들이 품고 있는 풍경이며 길은 여느 큰 산 못지않게 깊고 다양한 맛을 품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산은 낮아도 있을 건 다 있었고, 그 '있음'이 남부럽지 않더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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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언제나 사람에게로 향하는 법이다.

길은 다시 숲길로 이어진다.

가없는 설원 위에 그어진 외줄의 선분... 그 선분 위로 사람들이 간다. 그 선분의 끝은 결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길은 제 아무리 멀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은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법이다. 길이 그렇고, 인생길이라는 세상살이도 그러하다.

더러 길은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에는 길 자신마저도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제 가야 할 그곳으로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길은 길이 아닌 것이다.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향해 나아갈 때 길은 길이다.

그렇게 길은 그것이 땅 위의 길이든 삶의 길이든 그 지향점이자 끝은, 언제나 사람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길은 반드시 이어져야 할 그 사람과 이어져 있다. 어느 경우에는 빠르게, 또 어느 경우에는 느리게...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다 무릎이 깨져도 가야할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용기를 갖고 걷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정다운 사람이 함빡 웃음 띤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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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 여정 속에서야,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고, 목적지가 어디건 간에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전진해야 한다는 여정의 과제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과제마저도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보면 될 일이다. 약간의 용기만 있다면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어디일 것인가. 어차피 길이란 수만 갈래이니 그 어떤 길을 가려 걷는다한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 것이다.

누구나 길 위에서건, 세상살이에서건 정답이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정답이 있을 거라 믿으며 그 정답을 찾아 헤매는 우를 범한다. 그러니 정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두려움을 떨치고, 그냥 가보는 것이다. 정답은 스스로 선택하여 걷는 그 길 위에서, 아마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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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다시 고갯마루를 향한다. 재백이고개가 저 너머에 있다.

재백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 눈이 온다. 바람이 흩뿌려놓은 눈안개에도 심쿵(?)하던 차에,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세상의 풍경은 하얀색의 수채화 물감을 흩뿌린 듯 하늘과 산과 나무는, 그리고 사람들마저도 점점이 하얗게 채색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의 마음 역시 점점이 물드는 설렘을 어쩌지 못한다.

갑자기 일행들이 분주해진다. 풍경과 마음속 설렘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카메라폰은 갑자기 늘어난 업무 폭주에 열일을 하느라 찰칵찰칵~ 밭은 숨을 연신 몰아쉰다. 내게도 업무 분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지라,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끔씩은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내 역할에 즐거워하는 그들이 있기에 길을 걷는 것이, 눈이 오는 것이, 아마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걷고 있었던 것이다.

출발지점의 표고와 비교하면 고작 1~200m의 차이도 나지 않는 높이건만, 그래도 고개를 올랐다고 끙끙거리고, 또 헉헉대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소년 소녀가 되어 즐거워한다. 행복은 바로 내 눈앞 소소한 일상 속에 있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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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노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문득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지극히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냈던(사실은 책 제목만 도발적인) 김정운이 말하는 '재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에 따르면, '재미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했었다. '선택의 자유'가 재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산행이 누가 등을 떠밀어 온 것이라면 이렇게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인가. 눈 좀 왔다고 이제껏 숨겨놓았던 감성이 어찌 폭발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고, 만만의 콩떡일 것이다. 그들이 즐거운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제 스스로, 제 발로 왔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지각된 자유(perceived freedom)'라는 근사한 표현을 쓴다. 행복은 얼마나 자유로움을 느끼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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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정운은 그가 쓴 몇 권의 책에서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재미있게 잘 노는' 삶이 잘 사는 삶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근면과 성실을 강조한 산업사회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면, 21세기는 재미가 시대정신이며, '나는 놈 위에 노는 놈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백번 지당한 말처럼 들린다. 나도, 내가 아는 그 누구라도 잘 놀고 싶어 한다. 아니 놀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이나 나나 어떻게 노는 것이 잘 노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소주잔에 빠져 허우적대다 어설픈 미소나마 나누며 그래도 즐거웠지 않냐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인줄 아는 사람들이니 말해 무엇하랴.

다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잘 노는 것일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김정운은 '논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아지경의 경지까지 이르러야 제대로 된 '잘 노는' 것이라는데, 무아지경이라... 무아지경을 알지 못하니 더욱 어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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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힌트가 있다. 논다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노는 것은 유희가 아니라,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는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놀만한' 무엇이 있을 법도 하다. 돈벌이로서의 '일'이 아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그 무엇'을 찾아야만 한다. 왜냐면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니 다른 생각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고민해보면 될 일이다.

저자는 나아가 그 무엇을 통해,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narrative)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야기하기, 즉 자기 자신만의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내 생각과 느낌을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것은 사는 재미가 없다는 뜻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살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설사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 이야기를 통해 나를 설명할 수 있고, 나아가 그 이야기는 즐거운 것이었던가. 그의 충고는 어쩌면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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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우리는, 내 스스로 흥에 겨워 침 튀겨가며(^^) 할 만한 이야기는 있기는 한 것인지... 어쩌면 나는 즐겁게 사는 삶이 정답이라 수없이 뇌까렸지만, 정작 자신은 재미를 알지 못하고, 또 거부하고 살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재미있는 삶인지를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지엄한 호구지책의 기나 긴 여정에 함몰되어 그렇게 지친 삶과 동행하며 침묵하였노라 변명하며, 스스로를 기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일을 하지만, 모두가 변명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는 '자기가 찾은 작은 즐거움에 관해 가슴 벅차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삶이 진짜'라는 그의 지적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 재미가, 그런 삶이 멀리 있는 것도, 큰 무엇도 아니라는 그의 충고는 적잖이 위로가 된다.

그나마 나에게는 걷는다는 행위가 즐거움이나 재미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번개처럼 맞은 단비가 걷기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걸어야 할 이유는 늘리고 늘렸으니, 게으른 몸이 얼마나 따라줄까 그것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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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백이 고개를 넘은 길은 원암마을로 향한다.

앞서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른아른하다. 숲길의 끝을 통과하는 그는 세상 밖으로 나서는 이의 출사표처럼 굳건하고 빛의 여운을 담은 그릇마냥 빛이 난다. 그리고 거친 길을 헤쳐 나온 이의 자부심마저 배어 있는 듯하다. 길의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중에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성취와 위로도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문득, 잘 사는 삶이란 뒷모습마저도, 그가 떠난 자리마저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런 잘 사는 삶이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하고 물으시며 경북 봉화에서 농사지으시던 전우익 선생의 충고와도 닮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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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도 눈이 내린다.

마을에 내리는 눈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미루나무 끝에 매달려 있는 까치집부터 적시고 마을로 퍼져나간다. 하얀 차양을 두른 원암마을도, 마을의 어르신도, 나무 끝의 까치도 눈이 오는 고요 안에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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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변산-내소사코스 (6.2 km)

내변산탐방센터~실상사~봉래구곡~산정호수~(분옥담~선녀탕)~직소폭포~재백이고개~원암마을(or관음봉삼거리~내소사)

● 변산반도 국립공원(내변산분소)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변산로 2070번지
탐방 문의 : (063)582-7808
홈페이지 : http://byeonsan.knps.or.kr

● 가는 길

- 자가용 : 서해안고속도로 → 부안IC → 내변산 탐방지원센터 입구
- 대중교통 : 서울강남터미널에서 부안읍 가는 고속버스. 부안읍~내변산탐방안내센터, 내소사~부안행 버스 수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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