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 바다의 아름다운 푸른빛을 제대로 느끼려면 스쿠버다이빙을 해야 한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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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한적한 휴가를 원한다면 로타로 가자. 그림 같은 해변을 전세 낸 듯 즐기고 싶다면 로타로 떠나자. 장엄한 일출과 일몰을 감상하며 심신을 정화하고 싶다면, 역시 로타로 가야 한다.
경비행기는 사이판과 로타를 하루에 단 세 번만 오간다. 많아야 20여명 정도만 섬에 들어갈 수 있는 셈이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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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Rota)는 서태평양의 미국 자치령 북마리아나 제도에 딸린 작은 섬이다.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30분이면 닿는다. 경비행기는 로타와 사이판을 하루 세 번 왕복하는데 좌석이 10개뿐이다. 조종사 2명의 자리와 짐칸을 빼면 보통 6~7석이 남는다. 그마저도 섬 주민과 공유해야 하니 로타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많아야 하루에 20명 정도. 이쯤 되면 로타가 얼마나 평화롭고 여유로운 휴양지인지 감이 올 것이다.
어릴 적 파일럿을 꿈꿔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복잡한 계기판을 만지며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감상에 젖게 된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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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아 경비행기에서 조종사 바로 뒷자리를 배정받는다면 여행은 시작부터 특별해진다. 비행기가 구름 속을 넘나드는 장면을 훤히 뚫린 앞창으로 감상할 수 있고 복잡한 계기판을 조작하며 비행기를 모는 파일럿의 동작을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다. 기체가 작아 왠지 불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착륙 때는 오히려 대형기보다 사뿐하게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로타 인구는 약 3000명. 섬에는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은 물론 신호등 하나 없다. 여행을 하려면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해 다녀야 한다. 섬 전체 도로가 1차선인데 달리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좁은 섬에서 서로 다 아는 사이라 그런가 싶었지만 낯선 피부색의 뜨내기 관광객에게도 엷은 미소와 수인사는 똑같았다. 덕분에 앞만 보고 달리는 대신 주변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그만큼 운전도 천천히 하게 됐다. 병아리 일고여덟 마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눈앞에서 도로를 가로지를 때도 급정거할 필요가 없었다.
로타섬에는 ‘웨딩 케이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타이핑고트(Taipingot) 산이 있다. 섬 남쪽 일본군 대포가 남아있는 동굴에서 바라보면 웨딩 케이크와 아름다운 푸른 바다를 함께 조망할 수 있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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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 도로를 달리다 보면 “로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Rota loves you)라고 쓰인 문구가 눈에 띈다. 섬에 머무는 내내 따뜻하게 환영받는다는 느낌, 급할 거 하나 없는데 천천히 즐기자는 생각에 마음이 넉넉했다.
■ 오묘한 그 빛깔 ‘로타 블루’
로타는 ‘로타 블루’라 불리는 특유의 바다색으로 유명하다. 스쿠버다이빙은 그 아름다운 색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섬 남쪽의 다이빙숍에서 장비를 갖추고 픽업트럭에 올라 3분쯤 달렸을까. 금세 조그만 항구에 닿았다. 보트를 타고 앞바다를 내달리자 수심에 따라 바다색이 에메랄드빛에서 푸른색, 짙은 남색, 검푸른색으로 점점 변해갔다. 햇빛을 받아 찰랑대는 바다 표면은 반짝이며 더 다양한 색을 냈다. 생전 처음 보는, 황홀할 정도로 청명한 그 색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래서 도리 없이 로타 블루라고 부르는가 싶었다.
로타의 다이빙 포인트들은 물 속 가시거리가 50m가 넘는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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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포인트인 ‘제리스 리프’(Jerry‘s reef)에서 첫 다이빙을 시작했다. 물속에 들어가자 파란 물감통 속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수면 위에서 어른거리는 햇살이 물속으로 침투하며 오묘한 색의 농담(濃淡)을 만들어냈다. 시야를 아래로 돌리자 20여m 아래 하얀 모랫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30여 곳 되는 로타의 다이빙 포인트들은 모두 물이 맑아 가시거리가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보통 50m 앞까지는 선명히 보인다. 대신 여느 열대의 바다처럼 형형색색 물고기가 많지는 않다. 물이 맑은 건 부유하는 플랑크톤이 적기 때문이고, 플랑크톤을 먹이 삼는 물고기도 따라서 적은 것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기는 세상사란 게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하트 모양의 산호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다이버.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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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까지 잠수하자 너른 해저 마당에 노니는 수백 마리의 ‘가든일’(garden eel) 무리가 반겼다. 손가락만 한 크기로 미꾸라지처럼 생긴 가든일은 모래 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채 동물성 플랑크톤을 잡아먹는다. 조류에 따라 몸을 흔드는 모습이 꼭 정원의 풀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닮아 ‘정원(garden)+장어(eel)’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이버들이 가까이 다가가면 부리나케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게 꼭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코랄 가든’ 포인트에서 물고기 떼를 감상하는 김형규 기자. 블루팜다이브서비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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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포인트 ‘코랄 가든’(Coral garden)은 바다 밑으로 기다란 산맥이 펼쳐진 것처럼 거대한 산호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각기 뿔처럼 솟은 산호가 매달린 모습이 거산의 기암괴석을 보는 듯했다. 금강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노랫말로 외우고 있는 ‘일만이천봉’이 실제로 보면 이런 모습일까. 물속에서 노래를 부를 순 없고 마음속으로만 흥얼거렸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하비스커스 꽃을 가운데 올려 장식한 망고 케이크.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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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을 마치고 숍에 돌아와 보트 선장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망고케이크를 대접받았다. 히비스커스 꽃을 가운데 꽂은 케이크는 보기도 예뻤지만 싱싱하고 달콤한 망고를 듬뿍 올린 그 맛이 기막혔다.
■ 온전히 바다와 나뿐인 시간
꼭 스쿠버다이빙을 해야만 로타 바다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로타를 대표하는 장소를 한 곳만 꼽으라면 단연 스위밍홀(Swimming Hole)이다. 스위밍홀을 찍은 사진 한 장에 반해 로타를 찾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스위밍홀은 자연이 선물한 천연 바다 수영장이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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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홀은 해안가에 둥글게 늘어선 암초가 만들어낸 천연 바다 수영장이다. 암초는 밀려드는 파도를 대신 맞아 부드러운 거품으로 바꿔준다. 수영장 안에 찰랑대는 물은 깊지 않다. 바닥은 고운 모래여서 발을 다칠 염려도 없다. 유유자적 헤엄치다 고개를 들면 망망대해 짙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결정적으로 이 환상적인 수영장을 찾는 사람이 드물다. 오전 내내 스위밍홀을 독차지한 채 헤엄치고 일광욕하고 몽상하고 독서를 즐기며 절로 든 생각.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백사장과 야자수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테테토 비치.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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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홀은 차로도 코앞까지 갈 수 있지만 섬에서 가장 유명한 숙소 ‘로타 리조트 앤드 클럽’에서 걸어 들어가는 걸 추천한다. 잘 가꾼 골프장 정원을 지나 ‘네이처 트레일’이라고 쓴 팻말을 따라 울창한 숲길을 15분 정도 걷다 일순 탁 트인 바다를 만나는 쾌감이 있다.
로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테테토 비치에선 해변 전체를 혼자 전세 낸 듯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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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희고 고운 모래사장이 길게 뻗은 테테토 비치(Teteto Beach)는 로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다. 백사장과 바다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풍경은 남국의 정취 그대로다. 수심이 얕아 물놀이 하기도 좋고 원주민들이 만든 그늘막 쉼터에서 쉬어가기도 좋다. 모래 속에 파묻힌 예쁜 산호 조각을 찾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테테토 비치 역시 인적 드문 건 마찬가지다. 일행과 함께 호젓한 한때를 보내기에 그만이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숨겨진 스노클링 포인트 피나탕 파크.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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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우거진 숲을 헤치고 조금만 걸어가면 ‘비밀의 해변’이 나타난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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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탕 파크(Pinatang Park)는 놀이공원을 조성하려다 버려진 땅인데 현지인들만 아는 스노클링 포인트다. 도로에서 바로 이어진 작은 다리를 건너 해변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우거진 숲 사이로 숨겨진 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호초가 융기해 만들어진 커다란 바위 아래로 얕은 바다에 물고기가 천지다.
일본군 대포가 있는 섬 남부로 향하는 길. 우거진 나무가 초록 터널을 만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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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섬 남서쪽 끝에는 결혼식 때 흔히 쓰는 2단 케이크 모양으로 생겨 ‘웨딩 케이크’라는 별명이 붙은 타이핑고트(Taipingot) 산이 있다. 섬 남쪽의 일본군 대포가 있는 동굴이 웨딩 케이크를 조망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일본군 대포로 향하는 좁은 도로 역시 나무가 우거져 온통 초록 터널을 만든 모습이 로타의 자연미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아스 맛모스 절벽에서 쉴 새 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박력’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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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북쪽의 아스 맛모스(As Matmos) 절벽은 검은 바위에 사정없이 와서 부딪히는 파도가 높이 4~5m의 흰 포말을 흩뿌리는 장관을 만들어낸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한 단어는 ‘박력’. 아스 맛모스까지는 야자수 가지가 늘어진 비포장 도로를 20~30분 달려야 한다. 전화는커녕 라디오도 안 터지는 섬의 끄트머리를 향해 울퉁불퉁한 길을 흔들리며 가는 재미가 있다.
로타에 머무는 동안 일출과 일몰은 절대 놓쳐선 안 될 ‘이벤트’다. 매일 뜨고 지는 해가 별거냐 싶겠지만 로타에선 정말 다르다. 추천 일출 감상 포인트는 야생 조류 보호구역(Bird Sanctuary)이다. 마을을 벗어나 비포장 흙길을 10여 분 달려야 섬 동쪽 해안가에 넓게 자리 잡은 보호구역에 닿는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엔 그럴듯한 전망대도 마련돼 있다. 아직 여명이 밝기 전 사방은 어둡고 들리는 건 오직 파도와 바람 소리뿐. 거대한 자연 앞에 마주 서면 누구라도 제 삶을 돌아보고 잠시나마 근본적 고민을 하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바다와 맞닿은 섬 끝 절벽에 조성된 야생 조류 보호구역은 새들은 물론 일출을 감상하기에도 최적의 장소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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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거창한 생각이 아니어도 좋다. 바닷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새벽녘부터 강풍에 맞서 날갯짓을 쉬지 않는 새들만 봐도 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윽고 해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짙푸른 바다는 서서히 은빛으로 찰랑인다. 막 떠오른 햇빛을 받은 연노랑 나뭇잎들은 천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모습만 지켜보고 있어도 이 섬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낸 해가 연초록 나뭇잎들을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여가는 순간.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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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이면 송송 빌리지(Songsong Village)를 내려다보는 전망대로 올라가자. 송송은 원주민 차모로족 말로 ‘마을’이란 뜻이다. 섬의 유일한 부락이니 특별한 이름 없이 그저 마을이라 부르던 것인데 미군이 섬을 점령하며 뒤에 빌리지가 붙었다. ‘마을마을’이라는 어색한 이름에서 강대국의 점령과 지배로 점철된 섬의 슬픈 내력이 읽힌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송송 빌리지. 멀리 보이는 웨딩 케이크 산을 중심으로 왼쪽은 서태평양, 오른쪽은 필리핀해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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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송 빌리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석양. 마치 화가가 붓질 하는 것처럼 수평선 위 저녁 하늘이 시시각각 색을 바꾸는 모습을 감상하려면 해가 넘어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말고 20~30분은 기다려야 한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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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선 마을이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인다. 멀리 어느 집에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집에선 닭 우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퍼진다. 공터 농구장에선 어둑해질 때까지 통통통 공 튀기는 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왠지 녀석들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천방지축 동네 어귀를 누비던 내 유년시절도 어느덧 그 위에 겹쳐 떠오른다. 난생처음 와본 외딴 섬에서 왜 자꾸 익숙한 풍경과 감정이 되살아나는지 의아할 무렵 문득 깨닫게 된다. 로타는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무언가를 여전히 간직한, 비밀스럽고 소중한 섬이라는 것을.
테테토 비치에 드러누워 바라본 로타 하늘의 별무리.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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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미국)|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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