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이빨이 이번 인터뷰에서 사진을 갈음해 그린 자화상. 들개이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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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중에서도 ‘들개’, 여기다가 ‘이빨’까지…. 웹툰 작가 들개이빨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2015년, 그의 필명을 보고 기함했던 기억이 있다. ‘사나운 들개의 이빨로 세상을 가차없이 물어 뜯겠다’는 그 의도가 너무나 적나라해서! 마침 그가 연재하던 <먹는 존재>(2013~2018·레진코믹스) 주인공 ‘유양’이 무리하게 술을 권하는 사장에게 ‘굴’을 뱉는 바람에 회사에서 해고되는 장면을 읽던 때였다. ‘사회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적인 서열문화와 성차별적 관행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유양의 현란한 언사에 ‘과연 들개이빨이네’ 감탄했다. 감탄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2014 오늘의 우리 만화’ 수상작 <먹는 존재>는 연재 이후 지금까지 2500만회(7일 기준)에 달하는 누적 조회수를 올리며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고 동명의 웹드라마를 탄생시키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들개이빨이 최근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에서 연재하던 웹툰을 엮어 신간 <족하>(위즈덤하우스)를 출간했다. 그를 지난달 17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당연하게도 첫 질문은 이랬다. “왜 들개이빨인가요?”
<먹는 존재>(2013~2018)의 주인공 ‘유양’은 무리하게 술을 권하는 사장에게 ‘굴’을 뱉어버린다. 레진코믹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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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뜻 없어요. 인터넷 하다 보면 닉네임을 정해야 하는데 그냥 개를 좋아하고, 그러면 너무 짧으니까 ‘들’을 붙이고… 중성적인 느낌을 내고 싶어서 ‘이빨’을 붙여봤습니다.”
중성적으로 보이고 싶어 ‘이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는 그의 무의식에 웃음이 터졌다. 이날 인터뷰 내내 들개이빨은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그의 작품들에 최근 쏟아지고 있는 ‘탁월한 여성 서사’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먹는 존재>에서 세상을 거침없이 냉소하고 비판하는 고학력 백수 여성을 내세웠고, <홍녀>(2018·저스툰)에서는 수컷 생물만 골라 죽이는 초능력을 가진 중년 여성 이야기를 그렸다.
“제 만화의 특징들이 페미니즘적으로 해석되는 것에 반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러나 저 스스로 감히 페미니스트로서 뭔가를 만들어 냈다고 얘기하기는 좀 조심스럽네요.”
그의 작품마다 활약해온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 화자’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이미 너무 많이 드러낸 터라 언론을 통해서는 신상이나 얼굴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 후였다. ‘들개이빨’이라는 작명에 얽힌 이야기처럼, 그가 의도하지 않은 채 거둔 성취들이 흥미로웠다. 신간 <족하>는 그의 전작들보다도 더 복잡하고 다단한 여성의 서사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 작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족하>는 비혼주의자 여성인‘은남’이 주인공이자 메인 화자다. 남동생 부부,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와 함께 부모 집에서 살아가는 은남은 육아를 위해 별 수 없이 뭉친 이 대가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성에게 치우친 육아에 대한 책임, 어릴 때부터 강요되는 사회적 성역할, ‘올케’라는 호칭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멸시…. 결혼을 거부한 은남의 눈에, 가족 제도는 각종 성차별이 자라나는 안전한 배양지다.
전작 <먹는 존재>의 유양이었다면 진작 밥상을 뒤엎으며 화를 냈을 문제적 상황이 이어진다. 그러나 은남은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막 태어난 조카가 눈 앞에서 꼬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성차별의 온상인 동시에 조카가 자라는 안락한 요람이다. 가부장제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비혼을 선언한 이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을 꿈꾸는 이들과 공존해야 한다. 은남은 이같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비혼·기혼 등 다양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세상 바깥에 선 양 거침없이 비판을 이어가다가, 문득 자기혐오를 느껴 괴로워하던 유양의 ‘성숙’ 버전이라 할까.
이러한 변화에 대해 들개이빨은 “악한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놓고 여기에 틀에 박힌 비판을 늘어 놓는 것이 이제 부끄럽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코미디언이 ‘국회의원 똑바로 일하라’고 대뜸 일갈하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하고 박수치는 그런 연출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싫어하는 남자의 악행을 그리고 응징하는 작품은 이제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비판 대신 고민이, 일갈 대신 사색이 그의 작품을 채우기 시작한 이유다.
<족하>의 한 장면. 주인공 은남은 남동생 부부와 부모님이 조카를 양육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결혼제도 안과 밖의 여성이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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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딱히 ‘여성 서사’를 의도한 것도 아닌데, <족하>를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의 삶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왜 그럴까. “그저 재미를 찾았을 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중학생 때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방청을 갔던 일을 떠올렸다. “같이 간 친구는 깔깔거리면서 웃는데, 나는 녹화 내내 팔짱만 끼고 있었어요. 외모 비하만 일삼는 개그코드에 도리어 화가 날 정도였는데, 동시에 무안하고 부끄럽기도 하더라구요. 왜 모두들 웃고 있는데, 나는 웃지 못할까? 저는 이 고민을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어요.”
그는 “결국엔 나 자신에게 재미있는 작품을 만드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어릴 적 소아비만으로 인해 또래집단에서 폭력적인 놀림을 받는 일이 잦았고, 자라서는 고시에서 큰 점수 차로 떨어지는 등 실패를 반복적으로 겪어왔다던 들개이빨은 자신의 삶을 “다수에게 동의 받지 못하는 삶”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처럼 ‘동의받지 못한 이’들도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새로운 재미’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남성 중심 서사가 왜곡하고 은폐한 여성의 서사를 찾아가는 것이 ‘여성 서사’ 운동이라면, 다수에 의해 조롱당한 소수를 위한 재미를 찾아가는 들개이빨의 여정은 이미 같은 길을 걷고 있던 것 아니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남성이 주인공인 게 기본인 서사’만을 읽으며 자라왔고 여성 독자로서 자연히 이입하기 힘들었다.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면서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에 대한 반발일까. 들개이빨의 작품 속에서 남성들은 사회의 기본값은 커녕, 최솟값으로 축소됐다. <족하>에서 남성들은 모두 곤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벌, 개미, 풍뎅이, 쥐며느리 등 다양한 종들로 표현된 남성들은 인간의 말 대신 ‘즈브즈브’ 같은 울음 소리만 낸다. 이 설정에 대해 들개이빨은 “남자들이 성차별적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들을 할 때마다 화가 나니까, 그들을 조금이라도 귀엽게 표현하기 위해 곤충이라는 캐릭터를 가져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작품 속에선 남성들이 말을 잃고 세상의 언저리로 내몰린다. 그 사이 여성들이 언어를 독점하고 사회와 가족에 대해 끊임없이 떠든다. 그가 만들어 낸 ‘새로운 재미’는 이런 식으로 현실을 뒤집는다.
<족하>의 한 장면. 주인공 은남은 남동생 부부와 부모님이 조카를 양육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족 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한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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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성 서사는 변화를 꾀하는 중이다. 작중 은남은 내레이션 중 이렇게 말한다. “관찰자적 시점에서 속편하게 내레이션이나 하는 포지션을 무척 좋아하는 저에게 누군가의 인생에 깊게 개입하는 건 너무나 고통스런 일입니다.” 들개이빨의 여성 인물들은 대체로 은남처럼 ‘관찰자적 시점’에 머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 남자 조카인 휘빈이는 고모 은남에게 “돼지같다”고 놀리고, 여자 조카인 휘아는 벌써 ‘예쁜 짓’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익숙해졌다. 점점 더 성차별적인 문화에 물들어가는 조카들의 성장 앞에서 고모인 은남은, 그리고 들개이빨은 앞으로도 ‘속편한 관찰자 시점’의 ‘고민과 사색’에만 안주할 수 있을까?
실제 두 조카의 고모인 들개이빨은 작품 밖에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사고를 계속 치는 저 서툴고 미숙한 존재에게 참을성 없는 내가 과연 조카에게 안정적인 품질의 사랑을 꾸준히 공급할 수 있을까? 잘해낼 리 없잖아요.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어른으로 얼쩡거릴 확률이 가장 높을 텐데, 이런 인간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궁금하고 걱정되고… 그러다가 어이없어서 웃고 맙니다.”
그의 회의가 발전으로 나아가길 기대하며, 성소수자 이슈를 다룰 예정이라는 그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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