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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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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 배우지 못하고 꿈도 없었지만…

순천 한글교실 할머니들 그림책 발간

가난·일제시대·한국전쟁 아픔부터

상 뒤엎는 남편 버릇 고친 사연까지



한겨레

“산골에서 어렵게 살다 보니 늘 배가 고팠습니다. 꿈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내 또래 애들이 학교 가면 부러웠습니다. 나는 학교 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은 아들들은 다 학교에 보냈습니다. 나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딸이라고 공부를 못 하게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 뒤늦게 글을 배운 ‘순천 소녀시대’ 할머니 스무 명이 살아온 삶을 글로 쓰고 그림에 담아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막내가 50대 후반, 맏언니는 아흔을 바라본다. 2016년부터 순천시 평생학습관 한글작문교실 초등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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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이 들면 동심이 되살아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천진하고 색깔이 곱다. 그렇다고 밝은 얘기만 담긴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시대가 할퀸 생채기가 뚜렷하다. “인민군으로 갔다 왔다고 오해를 하고 모두 싸잡아 총살을 시켰습니다. 오빠는 그때 혼인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올케 될 사람은 오빠도 없는데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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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개인사는 가난, 시집살이, 남편의 바람과 폭력, 아들의 중학교 납부금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 한 사연 등 슬프고 가슴 아픈 얘기로 차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게 한다. 이모 집에 심부름을 가 엉겁결에 선을 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맘이 가” 결혼을 했다. 남편의 버릇을 고쳐놓은 얘기도 있다.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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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배우지 못해 영수증 따위를 읽을 수 없었고 손주들한테 동화책을 읽어줄 수 없어 창피했던 할머니들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이름과 집 주소를 쓰고 영어에도 도전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영어로 ‘헬로, 디져’라고 해 폭소를 터뜨리게도 하지만….

할머니들의 사연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알려져 지난해 서울에서도 ‘그려보니 솔찬히 좋구만’이란 이름의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제는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습니다. 공부도 그림도 너무 좋아 자랑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입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그림 남해의봄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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