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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전 세계가 모여 막춤을, 쿠바의 화끈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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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쿠바 여행기① 살사와 막춤 사이
중앙일보

쿠바 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흑인 연주자들은 신들린 무당처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두드리고 몸을 흔들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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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테마여행 1탄 ‘쿠바 속으로’가 성공리에 마무리됐습니다. 중앙일보 독자 15명이 함께한 쿠바 여행기를 테마에 따라 소개합니다. 첫 순서는 쿠바의 춤과 음악입니다.

쿠바는 보는 데가 아니라 하는 데다
쿠바는 춤의 나라다. 라틴 댄스의 대명사 살사가 이 나라에서 시작됐다. 룸바도 쿠바 춤이고, 맘보도 쿠바 춤이고, 차차차도 쿠바 춤이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몸치 아재’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딱 따닥 따~닥, 딱 따닥 따~닥. 살사의 기본 리듬이다. 광장에서도, 식당에서도, 기차에서도 막대기(끌라베스) 2개가 부딪혀 만들어내는 리듬이 아침부터 밤까지 반복 재생된다. 쿠바에서는 이 박자에 맞춰 심장이 뛴다.

“쿠바 가기 전에 살사 스텝이라도 익히세요.”

쿠바 여행을 조직한 김춘애 여행작가가 분명히 경고했었다. 살사 마니아 여행작가의 충고를 따랐어야 했을까. 아니다. 스텝 몇 개 외웠더라도 참사는 피하기 어려웠을 테다. 한국 아재의 몸뚱어리는 기껏해야 음주에나 최적화했을 따름이다.

쿠바에서 보낸 열흘. 허구한 날, 그리고 온종일 살사는 따라다녔다. 관광객 미어터지는 거리에서도,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도, 모히또 마시러 들른 카페에서도 살사는 도사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라이브 음악이었다. 딱 따닥 따∼닥. 막대기가 소리를 내면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흔들었다. 쿠바는 나라 전체가 살사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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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나시오날 호텔의 살사 공연 장면. 맨 왼쪽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의 아들 살바도르 레피라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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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토요일 밤 아바나 나시오날 호텔. 나시오날 호텔은 쿠바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1930년 개장한 이 호텔에서 쿠바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이 탄생했다. 1933년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1946년 미국 마피아가 집결했을 때 나시오날 호텔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윈스턴 처칠, 월트 디즈니, 프랭크 시내트라, 말론 브랜도 등 유명인사가 묵은 객실에 그들의 이름이 걸려 있다.

굳이 토요일 밤 나시오날 호텔에 간 이유가 있다. 나시오날 호텔의 카바레 ‘파리지엥’에서 열리는 라이브 공연 때문이다. 물론 살사다. 하나 격이 다른 살사다. 쿠바의 전설적인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바로 이 무대에서 공연했다. 지금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1907∼2003)의 아들 살바도르 레피라르가 이끄는 밴드가 토요일 밤에만 이 무대에 오른다. 쿠바 공연예술의 적통을 잇는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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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레피라르. 쿠바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이어 나시오날 호텔 무대에 오른다. 올해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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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격이 달랐다. 그러나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관객이 우르르 나와 플로어를 점령했다. 남자는 부지런히 여자를 돌렸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 연신 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일행 중에 살사 마니아 4명이 있었다. 그들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평생 춤하고는 담을 쌓고 산 70대 어르신들도 플로어로 나갔다. 살사였을까. 아무렴, 아니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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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리니다드 '까사 데 라 무시카'의 뜨거운 밤. 밴드 연주에 맞춰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이 막춤을 춘다.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댄스 본능이 일어나는 순간으로 쿠바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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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뜨리니다드에서도 유사 상황이 발생했다. 1월 21일 밤 뜨리니다드의 명물 야외 클럽 ‘까사 데 라 무시카(‘음악의 집’이라는 뜻이다)’에서였다. 우리에겐 이미 나시오날 호텔의 추억이 있었다. 두려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없었다. 프랑스·캐나다·이탈리아·콜롬비아·세르비아·볼리비아·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날아온 관광객이 라이브 연주에 맞춰 막춤을 췄다. 음악은 살사였지만, 춤은 살사와 딱히 관계가 없었다.

무대 옆 계단에는 다른 한국인 일행도 있었다. 그 팀에는 우리처럼 살사 마니아가 없었나 보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인이 쏟아져 나와 전신을 흔드는 현장을 꿋꿋이 지켜봤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나지막이 말했다.

“쿠바는 보는 데가 아니네. 하는 데네.”

슬픈 열대
살사에 푹 전 열흘이었지만(‘Salsa’는 원래 음식에 뿌리는 매운 소스를 뜻한다), 기억에 남는 건 룸바 공연이다. 일요일 오후 아바나의 아프리카 거리 ‘카예혼 데 아멜’에서 룸바 공연이 열렸다. 감동을 넘어 전율이 일었다. 날 것 그대로의 음악이 좁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 흑인 여성의 거친 육성이 흑인 여성의 맹렬한 타악기 리듬을 뚫고 나왔다. 리듬은 격동적이었으나, 멜로디는 어딘가 구슬펐다. 머릿속에서 제주 심방(무당)의 본풀이가 겹쳐졌다.

콜럼버스가 1492년 발견한 신대륙이 쿠바였다. 이후 400년간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쿠바의 식민시절은 여느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시절과 다르다. 원주민이 거의 멸종했기 때문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따르면 ‘스페인의 잔혹한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의 잔혹한 세균에 희생된 원주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288쪽).’

쿠바 원주민 대부분이 스페인 정복자와 함께 들어온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스페인은 시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 댈 노동력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싣고 왔다. 19세기 중반까지 약 350만 명의 노예가 쿠바에 끌려왔다. 원주민의 전통이 끊겼으므로, 아프리카 흑인과 스페인 백인의 혼혈 문화가 쿠바 문화를 형성했다. 살사·룸바·맘보·차차차 등 쿠바 음악의 바탕에 흑인 정서가 깔린 까닭이다. 쿠바의 초기 음악을 ‘손(Son)’이라 부른다. 일요일 오후 카예혼 데 아멜의 룸바가 쿠바 음악의 원형, 즉 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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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매주 일요일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좁은 골목에서 날 것 그대로의 룸바 공연이 펼쳐진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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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봉고'라고 불리는 타악기를 맨손으로 두드리며 연주한다. 봉고가 없으면 그냥 나무상자를 내리친다. 룸바는 흑인 노예의 음악에서 비롯됐다. 사탕수수밭의 노예에게 변변한 악기가 있을 리 없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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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춤으로서 룸바는 남녀의 애정행각을 표현한다. 여성 무용수의 손에 하얀 천이 들려 있다. 여성은 그 천으로 연신 제 몸을 가리는 동작을 하고, 남성은 여성에게 다가가 계속 집적댄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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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가 라틴 댄스의 원조로 통하게 된 데는 미국의 영향이 컸다. 1899년 스페인이 물러난 뒤 쿠바혁명이 성공한 1959년까지 쿠바는 미국의 신식민지였다. 그 시절 쿠바는 미국 자본주의의 하수구였다. 자본주의의 검은 이면, 나아가 추악한 정체가 미국 본토에서 약 150㎞ 떨어진 섬나라에서 공공연히 드러났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됐던 1920년대 미국의 마피아와 부르주아가 쿠바로 넘어와 그들만의 천국을 만끽했다. 카지노와 카바레, 그리고 매음굴에서 흘러나온 달러가 쿠바 경제를 주물렀다. 미국인 부르주아가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던 아바나의 카바레에서 살사·맘보·차차차 같은 흑인 노예의 전통 음악이 라틴 댄스 장르로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2’가 바로 그 시절의 미국 마피아를 다뤘다. 어쩌면 혁명의 기운은 카바레에 흐르던 살사 리듬에서 잉태했는지 모른다.

나시오날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했던 꼼파이 세군도는 혁명 이후 20년 넘게 시가 농장에서 일했다. 카바레 자본주의에 부역한 죗값을 치른 셈이다. 그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을 낸 건 1997년의 일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던 쿠바가 뭐든지 내다 팔던 때다. 미국의 신식민지 시절, 쿠바에 별장을 거느렸던 미국인 부르주아 중에 우리가 아는 이름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다음 편 쿠바 여행기의 주인공이다.

춤의 기본은 스텝(Step)이다. 스텝은 걸음을 떼는 동작, 즉 걷는 행동이다. 다시 말해 춤은 걷는 일이다. 그것도 상대와 함께 보폭을 맞추며 걷는 일이다. 이왕이면 박자와 함께. 딱 따닥 따~닥, 딱 따닥 따~닥. 쿠바에서 막춤 추다 깨우친 이치다.

쿠바=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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