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흑인 연주자들은 신들린 무당처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두드리고 몸을 흔들었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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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가기 전에 살사 스텝이라도 익히세요.”
쿠바 여행을 조직한 김춘애 여행작가가 분명히 경고했었다. 살사 마니아 여행작가의 충고를 따랐어야 했을까. 아니다. 스텝 몇 개 외웠더라도 참사는 피하기 어려웠을 테다. 한국 아재의 몸뚱어리는 기껏해야 음주에나 최적화했을 따름이다.
아바나 나시오날 호텔의 살사 공연 장면. 맨 왼쪽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의 아들 살바도르 레피라르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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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토요일 밤 나시오날 호텔에 간 이유가 있다. 나시오날 호텔의 카바레 ‘파리지엥’에서 열리는 라이브 공연 때문이다. 물론 살사다. 하나 격이 다른 살사다. 쿠바의 전설적인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바로 이 무대에서 공연했다. 지금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1907∼2003)의 아들 살바도르 레피라르가 이끄는 밴드가 토요일 밤에만 이 무대에 오른다. 쿠바 공연예술의 적통을 잇는 그룹이다.
살바도르 레피라르. 쿠바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리더 꼼파이 세군도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이어 나시오날 호텔 무대에 오른다. 올해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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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리니다드 '까사 데 라 무시카'의 뜨거운 밤. 밴드 연주에 맞춰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이 막춤을 춘다.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댄스 본능이 일어나는 순간으로 쿠바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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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옆 계단에는 다른 한국인 일행도 있었다. 그 팀에는 우리처럼 살사 마니아가 없었나 보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인이 쏟아져 나와 전신을 흔드는 현장을 꿋꿋이 지켜봤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나지막이 말했다.
“쿠바는 보는 데가 아니네. 하는 데네.”
콜럼버스가 1492년 발견한 신대륙이 쿠바였다. 이후 400년간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쿠바의 식민시절은 여느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시절과 다르다. 원주민이 거의 멸종했기 때문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따르면 ‘스페인의 잔혹한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의 잔혹한 세균에 희생된 원주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288쪽).’
쿠바 원주민 대부분이 스페인 정복자와 함께 들어온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스페인은 시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 댈 노동력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싣고 왔다. 19세기 중반까지 약 350만 명의 노예가 쿠바에 끌려왔다. 원주민의 전통이 끊겼으므로, 아프리카 흑인과 스페인 백인의 혼혈 문화가 쿠바 문화를 형성했다. 살사·룸바·맘보·차차차 등 쿠바 음악의 바탕에 흑인 정서가 깔린 까닭이다. 쿠바의 초기 음악을 ‘손(Son)’이라 부른다. 일요일 오후 카예혼 데 아멜의 룸바가 쿠바 음악의 원형, 즉 손에 가까웠다.
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매주 일요일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좁은 골목에서 날 것 그대로의 룸바 공연이 펼쳐진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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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봉고'라고 불리는 타악기를 맨손으로 두드리며 연주한다. 봉고가 없으면 그냥 나무상자를 내리친다. 룸바는 흑인 노예의 음악에서 비롯됐다. 사탕수수밭의 노예에게 변변한 악기가 있을 리 없었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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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아프리카 거리의 룸바 공연 현장. 춤으로서 룸바는 남녀의 애정행각을 표현한다. 여성 무용수의 손에 하얀 천이 들려 있다. 여성은 그 천으로 연신 제 몸을 가리는 동작을 하고, 남성은 여성에게 다가가 계속 집적댄다. 손민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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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됐던 1920년대 미국의 마피아와 부르주아가 쿠바로 넘어와 그들만의 천국을 만끽했다. 카지노와 카바레, 그리고 매음굴에서 흘러나온 달러가 쿠바 경제를 주물렀다. 미국인 부르주아가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던 아바나의 카바레에서 살사·맘보·차차차 같은 흑인 노예의 전통 음악이 라틴 댄스 장르로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2’가 바로 그 시절의 미국 마피아를 다뤘다. 어쩌면 혁명의 기운은 카바레에 흐르던 살사 리듬에서 잉태했는지 모른다.
나시오날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했던 꼼파이 세군도는 혁명 이후 20년 넘게 시가 농장에서 일했다. 카바레 자본주의에 부역한 죗값을 치른 셈이다. 그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을 낸 건 1997년의 일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던 쿠바가 뭐든지 내다 팔던 때다. 미국의 신식민지 시절, 쿠바에 별장을 거느렸던 미국인 부르주아 중에 우리가 아는 이름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다음 편 쿠바 여행기의 주인공이다.
춤의 기본은 스텝(Step)이다. 스텝은 걸음을 떼는 동작, 즉 걷는 행동이다. 다시 말해 춤은 걷는 일이다. 그것도 상대와 함께 보폭을 맞추며 걷는 일이다. 이왕이면 박자와 함께. 딱 따닥 따~닥, 딱 따닥 따~닥. 쿠바에서 막춤 추다 깨우친 이치다.
쿠바=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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