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 한산도와 추봉도를 가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본 한산도와 바다 풍경 [사진/조보희 기자] |
한산도는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할하는 해상 방어 총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초대 통제사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됐다. 한산도는 바로 이충무공의 섬이다.
1592년 음력 7월 7일 오후 2시 이순신 함대를 격멸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왜군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함대 73척을 이끌고 견내량(見乃梁, 통영 장평리와 거제 덕호리 사이의 좁은 해협)에 도착해 후발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영 남서쪽 당포에 도착해 있던 조선수군연합함대는 이튿날 새벽 견내량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수로가 좁고 물살이 세며 암초가 많아 우리 판옥선이 기동하기에 불리했다.
조선 수군은 와키자카의 함대를 남쪽의 통영 앞바다로 유인했다. 한산도 북쪽 방화도와 화도 뒤편에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은 학익진(鶴翼陣)으로 왜군 함대를 에워싸고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조선 수군은 이날 왜선 59척을 부수고 왜장 2명과 왜의 수군 8천여 명을 수장시켰다. 한산대첩은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분수령이었다.
◇ 대첩 펼쳐진 격전의 바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한산대첩이 펼쳐졌던 격전의 바다를 거쳐 한산도로 향했다.
왜군의 처참한 비명으로 떠들썩했을 그 옛날의 바다는 잔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왼편에는 조선 수군이 숨죽이고 숨어서 왜군을 기다리던 방화도와 화도가 떠 있다.
한산도에 거의 다다르자 거북 모양 등대와 한산대첩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객선은 출발 25분 만에 한산도 여행의 출발점인 제승당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객선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가면 제승당이 있는 이충무공유적지가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섬 안쪽을 돌아볼 수 있다. 함께 온 관광객의 발걸음을 따라 오른쪽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자 이내 유적지의 출입문인 한산문이 나타났다.
한산문을 들어서면 해안을 따라 난 길이 두 팔로 바다를 감싼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드넓다. 하늘에서 보면 전체적인 모습이 하트 모양이라고 한다.
길 한쪽엔 이순신의 '한산도가'와 '한산도야음'을 새긴 비가 서 있다. 동백나무와 아왜나무, 후박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반짝거리고, 소나무는 초록빛으로 싱그럽다. 동백나무는 벌써 붉은 꽃망울을 품었다.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이 함께 사용했다는 우물과 창을 든 모형 수군이 지켜선 대첩문(大捷門)을 지나 완만한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하다.
계단을 올라 충무문(忠武門)으로 들어서자 정면으로 팔작지붕을 얹은 제승당(制勝堂)이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승당은 지금으로 치면 해군작전사령관실이다.
제승당 내부 [사진/조보희 기자] |
◇ 충무공 있던 수루와 활터
제승당의 원래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고 운주당을 설치했다.
운주는 '지혜로 계책을 세운다'는 뜻으로 부하들과 소통하며 밤낮으로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는 충무공의 평소 모습이 담긴 이름이다.
얼마 후 이충무공은 조선의 해상 방어를 책임지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지금의 '통영'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충무공은 1593년 7월 15일부터 한양으로 압송되던 1597년 2월 26일까지 이곳에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을 짜고 군무를 관장했다.
운주당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왜군에 패하며 소실됐다가 1739년(영조 15)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敬)이 중건하고 '제승당'이라 명명했다. 제승은 '승리를 만든다'는 뜻이다.
총 1천491일에 달하는 난중일기 중 1천28일 치가 이곳에서 쓰였다.
제승당 안쪽 벽면에는 그림 5폭이 걸려 있다. 거북선이 최초 등장한 사천해전, 학익진을 펼친 한산대첩, 이충무공이 전사한 노량해전, 수루에서 기도드리는 이충무공, 한산도에서의 진중 생활 등을 묘사하고 있다.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팔사품을 그린 병풍, 전투 때 사용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도 놓여 있다. 또 제140대 통제사 김영수(金永綬)가 1786년(정조 10)에 썼다는 제승당 현판을 볼 수 있다.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망루인 수루 [사진/조보희 기자] |
제승당 오른편에는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망루인 수루(戍樓)가 있다. 이충무공이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했다"던 그 수루다. '戍樓' 현판은 지난해 난중일기에서 집자(集字)한 글씨로 교체한 것이다.
1595년 10월 5일 자 난중일기에는 "이른 아침에 누각에 올라 역사(役事)하는 것을 보고서 다락 위 바깥쪽 서까래에 흙을 치올려 발랐다. 투항해온 왜놈들을 시켜 물건 나르는 일을 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의 수루는 1976년 신축된 것으로 2014년 목조로 개축됐다. 수루에 서자 솜털 같은 구름이 장식한 푸른 하늘 아래 호수 같은 바다와 섬이 펼쳐졌다. 수루 안에는 한글로 쓴 '한산도가' 편액이 걸려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제승당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한산정(閑山亭)이다.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곳이다.
한산정에 서면 바다 건너 비탈에 과녁 3개가 마련돼 있다. 과녁까지 거리는 약 150m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이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병사들이 조수에 따라 달라지는 목표물까지의 거리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난중일기에는 떡과 막걸리를 걸고 활쏘기 내기를 하고 이후 모두가 배부르게 먹었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한산정 출입문 왼쪽으로 홍살문과 삼간문을 지나면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영정 속에서 통제사 관복 차림의 이충무공은 근엄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당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편지를 모은 서간첩(국보 76호)과 송나라 역사를 읽고 쓴 독후감인 독송사(讀宋史)에서 뽑은 내용을 담은 병풍이 있다.
이 서간첩에는 그 유명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가 들어 있다. 독송사 중 "무릇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죽음이 있을 뿐 두 가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병풍에 한자로 적혀 있다.
홍살문과 삼간문 사이에는 통제사 조경과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이 세운 유허비가 있고, 맞은편에는 '리충무공계시던제승당의터다'라 적힌 한글비가 서 있다.
이 한글비는 1948년 광복을 기념해 경상도 내 초·중등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글씨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썼다.
활쏘기 훈련을 했던 한산정 [사진/조보희 기자] |
◇ 섬 곳곳에 남겨진 전란의 기억
이충무공유적지를 방문했다면 이제 이순신 장군의 섬인 한산도를 돌아볼 차례. 제승당 선착장에서 왼쪽으로 난 한산일주로를 따라가면 된다.
띄엄띄엄 자리한 마을들은 우리 수군의 승리를 위해 각기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병참 마을이었다. 각각의 임무에 맞게 붙은 마을 이름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대고포(大羔浦). 임진왜란 때 군수용 소금을 구워 공급한 염전이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예전에는 염전이 있던 곳이라 해서 염포(鹽浦)라 불렀는데 이후 염소를 뜻하는 고(羔)자를 붙여 고포라 바꿔부르게 됐다. 인근에는 소고포가 있다.
다시 남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장곡, 창동, 입정포 마을이 차례로 나타난다. 장곡(長谷)은 장곡 본 마을과 독암마을, 벌통골 등 3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장곡 본 마을은 한산도 중앙에 있는 망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제승당에 전달한 당산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군영에 필요한 숯과 연료를 공급했다. 독암마을에서는 수군에게 필요한 질그릇을 빚었고, 벌통골에서는 꿀을 채취했다고 한다.
창동(倉洞)에는 군량미 약 3천 석을 비축한 창고가 있었다. 입정포(立定浦)는 수군들이 일대 해역을 초계하다가 일시 입항해 정박한 곳이다. 이곳은 특히 물이 좋고 수량도 풍부해 가뭄 때면 섬 내 마을에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다음은 한산면사무소가 있는 진두(津頭).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진을 치고 경비초소를 두었던 곳이라 진두(陣頭)라 칭하기도 했다.
진두 인근 야소(冶所)는 이충무공이 대장간을 설치하고 병장기를 제조, 수리했던 곳이다. 야(冶)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인 풀무를 뜻한다.
남쪽 끝자락에 있는 의암(衣岩)은 우리 수군의 군복을 짓고 수선하던 피복창이 있던 곳이다. 이곳 해안가 바위와 몽돌밭에 군복을 널어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에 있었다는 커다란 바위와 몽돌밭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다.
군수물자를 조달, 보급하는 일을 맡았던 하포(荷浦)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한산도 서쪽 해안에 장작지(長作支)가 나온다. 이곳은 이충무공의 진도(陣圖, 진지의 모양을 그린 그림)에 의해 학익진 등 각종 진법을 훈련했던 곳으로 예전에는 진작지(陣作支)라 불렀다.
북쪽에는 '개미허리'라는 뜻을 가진 의항(蟻項)이 있다. 제승당과 문어포(問語浦) 사이로 좁은 물길이 깊숙이 파고든 맨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한산대첩 때 패퇴한 왜군들이 이곳 좁은 물길로 쫓겨 들어와 한 노인에게 "이리로 가면 바닷길이 열려 있느냐"고 묻자 노인이 거짓으로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로가 막혀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자 왜군들이 산허리를 뚫고 도망가기 위해 개미 떼처럼 엉겨 붙었다고 한다.
의항 왼쪽으로 난 산길을 넘으면 문어포이고 이곳 음달산 정상에는 거북선을 좌대로 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기념비가 서서 그 옛날 해전이 벌어졌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념비에는 "여기는 민족의 맥박이 뛰는 한산섬 바다. 굽이치는 파도 위에 눈부신 승리의 역사. 오늘 다시 그날의 한산대첩을 되새겨본다…한산섬 앞바다는 민족의 마음의 고향. 창파를 내다보면 눈부신 승리의 역사. 오늘도 혈관 속에서 힘이 절로 솟는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문어포 인근에 있는 한산대첩기념비 [사진/조보희 기자] |
◇ 한국전쟁 수용소 있던 추봉도
한산도 남동쪽에는 추봉도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섬에는 예곡, 추원, 봉암, 곡룡포 등 4개 마을이 있는데 이 중 예곡과 추원에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이곳에 수용소를 세워 1만여 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수용소가 설치되며 기존 마을 주민들은 강제 이주했고 휴전 협정 이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곡마을 도로변에는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마을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옛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내판에 따르면 예곡과 추원에 포로수용소 건물이 있었고, 두 마을 사이에 지휘사령부, 장교식당과 숙소, 미군수송대, 미군 막사 등이 있었다.
꼼꼼히 살피면 폐교한 추봉분교 주변과 예곡마을, 밭에서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옛 지휘사령부가 있던 추봉분교 인근에, 현재 간이화장실이 설치된 곳은 차량정비소 자리다. 화장실 아래에는 길이 약 1m의 장방형 시멘트 구조물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추원마을 뒤편 언덕에 있는 밭에서는 길이 약 5m, 높이 약 3.5m로 남아 있는 1m 두께의 수용소 건물 벽을 찾아볼 수 있다.
추봉도에는 길이 1㎞ 해변에 까만 몽돌이 깔린 봉암해수욕장도 있다. 해수욕장과 인근 마을에는 바다와 몽돌을 주제로 한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추봉도에 남아있는 포로수용소 건물 벽 [사진/조보희 기자] |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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