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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50] 홍매(紅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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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紅梅)

얼음 밑에 개울은 흘러도

남은 눈 위엔 또 눈이 내린다.

검은 쇠붙이 연지를 찍는데

길 떠난 풀꽃들 코끝도 안 보여

살을 찢는 선지 선연한 상처

내 영혼 스스로 입을 맞춘다.

―김상옥(1920~200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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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녘 큰 절 마당에는 벌써 홍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소식입니다. 그걸 한번 알현하겠다고 벼른 지 오래인데 아직 못 가보고 있습니다. 큰 계곡의 한 길씩 언 얼음도 이즈음이면 녹아 속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날마다 커집니다. 하지만 아직 다 가지 않은 막내뻘의 겨울이 남아 때 없이 함박눈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붉은 매화 꽃잎 위에 흰 눈이 앉아 서로 웃으면 그대로 못 견딜 어여쁨이 되지요.

오래된 매화 등걸에서 삐져나온 가지들은 녹슨 무쇠붙이입니다. 거기서 피어난 꽃은 그러나 신부의 ‘연지’와 같습니다. 추위에 피난 가 돌아오지 않는 ‘풀꽃들’은 흉내 낼 수 없이 깊은 울림의 빛깔입니다. 뭇 꽃들 아직 피어나기 아득한 시절의 고독한 ‘홍매’는 ‘연지’같은 것만은 아니어서 그대로 선구자의 ‘선연한 상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상처’에 기꺼이 영혼을 떠올립니다. ‘설중매’라던가요? ‘영혼’은 그러해야 한다는 뜻을 봅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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