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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보수의 심장' 런던마저… 상점에서 현금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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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김아진 특파원




토니 테일러씨는 얼마 전 영국 런던의 한 바(bar)에서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을 했다. 맥주와 안주 등을 시킨 뒤 평소처럼 더치페이로 나눠 계산하려다가 당황했다. 가게 직원이 "죄송하지만, 작년 10월부터 현금을 받지 않는다"며 모두에게 카드 계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테일러씨는 "스웨덴 등 다른 유럽 국가가 캐시리스(cashless·현금 없는) 사회로 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보수적인 영국에서조차 현금이 쓸모없어지다니 왠지 모르게 슬프다"고 했다.

이처럼 현금을 아예 안 받는 상점이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늘고 있다. 이미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연합(EU) 내 주요국들에서 종이 화폐와 동전 대신 신용카드 등 디지털 거래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현금 고객에게는 어떤 것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음식점 등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영국 언론 미러는 "작년 9월 현금 안 받는 음식점이 처음으로 생긴 이후 많은 가게가 이 대열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영국 런던서 "현금 안 받는다"는 펍 늘어나

영국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보유하고 있는 펍(pub)인 '크라운앤드앵커'는 작년 10월 일부 지점을 시작으로 런던 중심부 지점들에서 현금을 받지 않고 있다. 술집 곳곳에는 "카드만 받습니다. 죄송하지만 디지털 시대입니다"란 문구가 붙었다. 처음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직원과 고객들을 타깃으로 한 현금 털이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누군가 '아예 현금을 받지 말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이 회사의 운영 책임자인 아버 로자하는 "총수익의 10~13%만이 현금"이라며 "동전을 세는 캐셔, 은행 업무를 보는 매니저 등을 따로 두는 비용보다 현금을 안 받는 게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는 "초기엔 고객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지난 몇 개월간 수익 측면을 봐서도 눈에 띄게 감소하는 일이 없었다"며 "고객들도 익숙해지고 있다"고 했다.

맨체스터의 레스토랑 '욀', 런던 동부의 커피숍 '브로클리스 브라운스' 등도 '캐시리스'를 선언했다. 유명 프랜차이즈 인도 음식점인 '디슘'도 작년 12월 트위터에 '요즘 현금 사용이 거의 없는데, 현금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란 글을 게재하고 고객들의 의견을 묻고 있다. 영국은 2014년부터 현금을 내고는 버스도 탈 수 없다. 욀의 소유주인 데이비드 매콜은 "현금을 입금하려면 건당 은행 수수료로 5파운드(약 7500원)쯤 줘야 하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카드가 없는 고객들에게 공짜로 맥주를 주는 편이 가게 매상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했다.

◇英 은행은 현금 입금 때도 수수료 받아 현금 거래 불편

영국의 은행 업무는 매우 번거로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일반인의 경우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체크카드로 인출은 가능하지만 입금은 할 수 없다. 입금을 하려면 업무시간(오전 9시~오후 4시)에 직접 은행을 방문해 지로를 작성해야 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수수료도 내야 한다. 현금으로 입금한 돈이 계좌로 들어오는 데에도 1~3일 이상 걸린다. 영국 언론들은 "현금 처리 과정에 시간과 돈이 각각 주당 6~10시간, 매년 1000~3000파운드(약 150만~450만원)가 들어간다"고 했다. 카드 가맹점 수수료가 과다하다고 논란이 되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에선 카드 가맹점 수수료도 이 돈에 비해선 적다는 얘기다.

게다가 영국 등 유럽에선 음성적 방법으로 유통되는 블랙머니(black money·불법자금)에 대한 감시가 강해 많은 계좌에서 적지 않은 돈을 자주 뺐다 넣었다 하면 이에 대한 해명을 수시로 해야 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카드 결제는 신속하게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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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점주 입장에선 현금 관리에 소요되는 비용을 아껴서 다른 서비스 분야에 투자할 수도 있다. 실제 프랑스와 독일의 대형 화장품 가게나 패스트푸드점도 카드로만 결제가 가능한 터치스크린 머신을 대거 늘리고 사람이 현금을 주고받는 캐시데스크를 최소화하거나 없애는 쪽으로 추진하고 있다. 맥도널드의 한 매니저는 "매우 바쁜 시간대를 빼면 캐시데스크를 거의 비워놓는 상황"이라며 "대신 고객들에게 음식을 직접 가져다주는 등의 서비스 직원을 더 많이 배치하고 있다"고 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각각 소비자 거래의 39%, 33%가 카드로 이뤄지고 있다.

◇고령층·장애인 등은 '캐시리스'로 소외 우려도

하지만 영국 등 유럽에서 현금을 거부하는 상점이 많아지자 "과연 바람직한 길인가"라는 비판도 나온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무현금화가 심화되면 노인 등 수백만 명이 경제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다. 터치스크린 사용이 어려운 파킨슨 환자, 장애인 등도 디지털 접근이 어렵다"며 "이런 엘리트주의로 가는 경제는 매우 슬프다"고 했다. 한 인터넷 뉴스도 "현금 고객의 경우 계산하고 남은 동전 등으로 팁을 주는데 카드 문화가 정착되면서 팁도 인색해졌다"며 "팁으로 생활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도 캐시리스 사회는 최악"이라고 했다.




런던=김아진 특파원(metin10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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