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바하' 이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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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이자성·'관상' 수양대군·'신과함께-죄와벌' 염라대왕…작품마다 말맛 살려 유행어 생겨
'사바하'에서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리듬 가미한 독백 돋보여…"악귀를 잡는 악신이라…"
화자에 가까운 캐릭터, 세세한 의상·분장으로 입체감 커버 "종교 관계없이 믿음 많이 전파되길"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관상)." "거 중구형, 이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신세계)." "어이, 나랑 얘기 좀 할까(암살)?" 유행어가 된 대사들을 직접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맛을 잘 살린다는 칭찬에 배우 이정재(47)는 방긋 웃었다. 호기롭게 대사를 읊더니 "몇몇 대사는 대체 왜 유행하는지 모르겠어요"라며 쑥스러워했다. 그는 캐릭터 설계의 달인이다. 평범한 인물의 대사도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매력적인 저음으로 자유롭게 리듬을 가미한다. 그 덕에 맡은 배역들은 하나같이 입체적으로 나타난다. '도둑들(2012년)'의 뽀빠이, '신세계(2012년)'의 이자성, '관상(2013년)'의 수양대군, '암살(2015년)'의 염석진, '신과함께-죄와벌(2017년)'의 염라대왕 등이다.
"이제는 만인의 목소리가 된 것 같아요. 제 주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양대군이나 이자성을 흉내 내더라고요. 처음에는 연기를 못해서 놀리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웃음거리가 된 줄 알았죠.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어요. 이제는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내심 '이번에는 어떤 대사가 유행할까'라고 기대하기도 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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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배우들은 시나리오 속 대사들을 표현하기 쉽게 바꾼다. 입에 착 달라붙게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바꾸거나 조사와 어미를 생략한다. 이정재는 일련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는다. 대신 배역의 특징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주변에서 어울리는 화법을 찾는다. 신작 '사바하'에서 연기한 박 목사의 경우 이 영화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말투를 많이 따라했다. 박 목사의 대사를 감정을 실어 읽어달라고 해 녹음한 뒤 반복해서 들었다.
"박 목사는 이야기를 뱅뱅 돌리면서 말하는 사람이에요. 은유적인 표현을 자주 쓰고, 상대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죠. 그 모습을 상상하니까 장재현 감독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대사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죠. 녹화된 영상을 보며 집에서 연습한 덕에 배역의 특징을 확실히 잡아낼 수 있었어요. 말맛도 살릴 수 있었고요. '대립군(2017년)'을 촬영할 때는 소속사(아티스트컴퍼니) 신인배우들이 연기를 배우는 학원에 가서 스무 번쯤 따로 레슨을 받았어요. '태풍(2005년)'을 찍을 때는 최형인(70) 한양대 교수님을 찾아가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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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하에서 이정재의 대사 연기는 매우 중요하다. 박 목사는 신흥 종교 비리를 찾아내는 종교문제연구소를 운영한다.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단체의 실체를 파악하며 다양한 미스터리를 마주하는데, 능동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화자(話者)가 되어 그 상황을 소개하거나 설명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비중이 낮아진다. 배역의 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여지도 적다. 하지만 그는 배우로서 변주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대립군의 촬영을 마치면서 현대물을 통해 일상적인 삶을 사는 배역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극적인 인물들을 많이 연기한 탓인지 '과연 어울릴까'라는 고민이 따르더라고요. 사바하는 갈증을 해소할 좋은 기회였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미스터리의 원인을 찾아내서 관객에게 알려드리는 캐릭터잖아요. 감정이 변하거나 에너지를 뿜어내는 일이 없어서 갖가지 정보를 시의적절하게 전달하는데 주안점을 둬야 했어요.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관객이라고 할 수 있죠.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면서 놀라워하는 모습 등이 일치하니까요. 관객의 동질감을 끌어내면서 이야기를 얼마나 정확하게 전하느냐가 중요했어요. 특히 '악귀를 잡는 악신이라….'나 '지국천왕의 경전이라….'와 같은 독백이요. 대상이 없다보니 표현하기가 까다롭잖아요. 다양한 느낌으로 여러 차례 연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말로 보험을 여러 개 가입하는 기분이었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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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는 사바하에서 부각되기 어려운 단점을 의상 등 다양한 설정으로 메운다. 데뷔 초부터 의상을 직접 고르기로 유명했다. 집에 있는 옷들을 가져다 '태양은 없다(1998년)'의 홍기, '시월애(2000년)'의 성현, '오! 브라더스(2003년)'의 오상우 등 다양한 배역들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박 목사는 얼핏 보기에 큰 특징이 없다. 하지만 비슷한 장르물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나인스 게이트(1999년)' 속 고서감정사 딘 코소(조니 뎁)와 많이 닮았다. 말쑥한 정장과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 반듯이 빗어 넘긴 긴 머리.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까지 판박이다.
"신경을 안 쓴 것처럼 보이지만 의상, 분장 스태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미스터리 장르이다 보니 안경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최적화된 물건이라면서요. 그런 의도를 알고 나면 연기하기가 훨씬 수월해져요.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서죠. 촬영장에서 뒤늦게 그런 느낌을 받고 배역의 정체성을 깨닫기도 해요. 박 목사가 그랬어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목사가 담배를 왜 이렇게 많이 펴'라며 의아해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금연초를 뿜어대며 연기하니까 답이 금방 나오더라고요. 껄렁하고 반항심이 많은 종교인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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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는 초반엔 속물처럼 묘사되지만 추적하는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면서 종교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기독교 신자인 이정재는 영화가 주는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종교에 관계없이 그런 믿음이 많이 이들에게 전파되기를 희망한다. 작품에서 자신이 부각되지 않고, 신흥종교 이야기를 하는데 부담을 느끼면서도 사바하에 출연한 이유다.
"옳지 않은 믿음을 전파하는 종교인을 처단하는 내용이잖아요. 심지어 기독교의 박 목사와 불교의 해안스님(진선규)이 협력해 불법 종교단체를 정화시키고요. 그야말로 두 종교의 화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웃음). 잘못된 믿음을 심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범죄에요.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지만, 사회에서 어떻게든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좋아해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진실한 믿음을 나누고 싶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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