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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우당·심산·단재…독립운동의 ‘3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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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삼걸’, ‘삼두마차’로 항일 투쟁 앞장

임시정부 의정원도 참여…이승만 체제 반기

우당·심산·단재 기념사업회 3인 공동 추모

서울서 시작해 대전, 청주 등 순회 전시 추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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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중국 베이징은 상하이, 만주와 더불어 국외 독립운동의 세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정부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새 길을 냈던 ‘삼걸’(세 영웅), ‘삼두마차’로 불린 세 거목이 있었다.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선생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맏형은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당대 최고 명문가 출신이던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뒤 6형제와 상의해 논밭 등 모든 재산(현재 가치로 600억원대 추정)을 처분한 뒤,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중국과 국내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우당은 1912년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세워 독립군 3천여명을 양성했다. 이후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을 꾸려 무장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우당은 단재 신채호 선생을 베이징으로 이끌기도 했다. 단재는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등을 집필하며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단, 박달학원 등을 세워 청년 교육에 힘썼다. 우당과는 무장 항일 투쟁과 무정부주의자로 의기투합했다. 의열단 강령으로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도 단재가 썼다. 둘은 중국 뤼순 감옥에서 4년 터울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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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은 언론인으로 단재와 가까웠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상소를 해 투옥됐다. 1910년 한일병탄을 한탄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림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 발각된 사건인 파리장서사건(유림단 사건) 등을 주도했으며, 중국 국민당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터를 닦았다. 1920년엔 박은식 선생과 <사민일보>를 창간했으며, 단재와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를 발행했다.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서로군정서의 군사선전 위원장을 지내는 등 역시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이들 세 명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 참여했다가 이승만 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반기를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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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삼걸’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선다. 단재기념사업회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0돌을 맞아 우당, 심산, 단재 선생 특별전 ‘베이징 독립운동의 세 불꽃’(가칭)을 연다고 21일 밝혔다. 세 선생의 기념사업회가 의기투합했다. 오는 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특별전을 연 뒤, 대전, 청주 등 지역 순회전도 기획하고 있다.

전시에선 우당 선생의 인보를 실물 공개하고, 심산 선생의 아들 김환기 화백이 그린 심산 초상화 복제품, 단재 선생의 친필 원고 영인본 등을 만날 수 있다. 원종문 단재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세 선생의 기념사업회 등이 소장하고 있는 귀한 자료를 토대로 스토리 텔링 형태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베이징으로 옮겨간 이들이 독립운동의 방향을 고민하고, 의열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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