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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송파 세 모녀 사건 5년, 아직 못 푼 빈곤의 숙제]정부, 지레짐작으로 재정부담 타령…정확한 조사로 비용부터 파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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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빈곤대책 ‘공염불’ 안되려면

경향신문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행동’ 소속 회원들이 2017년 5월 기초생활 수급자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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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사각지대의 가장 큰 원인

‘부양의무자 요건’ 폐지 지적에도

재정당국, 정확한 추산 못하면서

상당한 예산 들어간다며 손사래

실제 비용은 훨씬 적을 수 있어


“저의 농성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저처럼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구에 금전적 지원을 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1999년 도입된 지 2년 후인 2001년 12월. 당시 서른여섯 살의 여성 최옥란씨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텐트농성을 시작했다. 청계천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최씨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지만 그가 받던 한 달 급여는 28만원에 불과했다. 장애로 인한 치료비나 아파트 임차료 등을 감당하기에 턱없는 금액이었다. 최씨는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1주일간 농성을 벌였고 생계급여도 정부에 반납했다. 하지만 그의 투쟁의 성과는 미미했고 이듬해 2월 자살을 시도해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등졌다.

최씨의 죽음 뒤에도 가난으로 고통받던 서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바람을 얘기해왔다. 이들의 요청은 크게 두 가지였다. 보다 많은 이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의 문턱을 낮춰달라는 것, 그리고 보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2000년대 초부터 거리에 울려퍼졌으나 제도 변화의 속도는 더뎠다. 그사이 돈이 없어 촛불을 켜놓고 자던 일가족이 화마에 휩싸였고, 가난해도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세 모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가난해도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보장받는 세상’은 왜 멀기만 할까. 전문가들은 재정 문제 등 여러 이유를 꼽았다. 정부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과감한 변화를 자제해왔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식도 넘어야 할 산이다. ‘복지 대상의 문턱을 낮출 경우 부정수급이 늘어난다’ ‘국민연금 등 기본적인 소득보장이 부실한데 빈곤대책만 강화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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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정이 많이 든다 지적하기 전에 규모부터 명확히”

빈곤대책이 피부로 느껴지려면 재정 문제 해결은 필수적이다. 가난하지만 국가에서 지원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에게 기초생활급여를 추가로 주는 것도,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도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원받고 있는 이들의 급여 수준을 올려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요 예산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대책은 그만큼 현실화되는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

시민단체들은 복지 사각지대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부양의무자 요건’의 완전 폐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부양의무자 요건은 생계·주거·의료·교육급여 전체에 적용돼왔지만, 현재는 생계·의료급여에만 적용되고 있다. 그간에는 가난한 이들이라고 해도 ‘부양할 의무가 있고 소득이 충분한’ 가족이 있다면 정부가 지원하지 않았으나, 형식적으로만 가족이고 실제 도와주지 않는 행태가 확산된 만큼 부양가족 유무에 상관없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요 예산을 두고 정부 부처 간에 신경전이 오가며 부양의무자 요건 완전 폐지는 좀처럼 결론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우리는 부양의무자를 폐지하자는 입장이지만, 재정당국은 쉽지 않다고 해 부처 간에 씨름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요 재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만 정부에선 생계·의료급여에서 이를 정확히 추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상당한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정책이 미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참여연대 측은 “현재 소요되는 예산을 기준으로 보면, 생계급여에서 부양의무자 기준만 폐지할 때 추가로 들어가는 돈은 1년에 1조6401억원 이하로 추정된다”며 “소요 예산이 크지 않은 만큼 생계급여의 부양의무자 기준부터 시급히 폐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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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여성인권운동가 최옥란씨의 생전 모습.


■ 복지 문턱 낮추면 부정수급 폭증할까

비수급 빈곤층을 줄이기 위해 부양의무자 요건을 폐지하거나 재산 요건을 완화하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수급자가 될 기회를 넓혀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사각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구제될 수 있지만, 낮아진 문턱을 악용해 빈곤층이 아닌 이가 이득을 볼 가능성도 있다.

재산이 충분함에도 그 재산을 미리 자녀에게 증여해주고 자신은 소득 요건만 만족시켜 수급을 받아 생활하는 사례가 그것이다. 이 때문에 그간 복지 확대를 원하는 목소리가 나올 때면 한쪽에서는 “부정수급에 따른 재정 누수부터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과거 정부, 부정수급 근절만 강조

재산 확인 등 제도적 장치 많아

복지 문턱 낮춰도 부작용 적을 것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우 복지 수급 기회를 늘리기보다 부정수급 근절을 더 강조했다.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취지였다. 2010년에는 통합전산망이 도입돼 부양의무자와 수급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졌으며, 근로능력 평가도 강화됐다. 이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제도 문턱을 낮추는 대책은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또 부정수급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복지수급자에 대한 시선이 악화되고 복지정책 확대를 우려하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전문가들은 복지 문턱을 낮추는 게 반드시 부정수급 폭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제도적 장치를 통해 부작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찬섭 동아대 교수는 “사회보장정보원에서 60여개 기관의 정보를 받아 개인의 부정수급 여부를 분석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등 부정수급을 확인하는 제도적 장치가 이미 다수 마련된 상태”라며 “근로능력을 엄격하게 따지고 재산을 은닉한 사실이 없는지도 촘촘히 따지고 있어 부정한 방법으로 수급받는 사례는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선 순천향대 교수도 “현재는 수급자로 들어올 수 있는 소득과 재산 기준이 워낙 낮기 때문에 이 기준이 다소 완화된다 해도 고의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가며 수급자가 되려는 가구는 드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부는 향후 복지 문턱을 낮추고 부정수급 가능성은 별도 관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복지부 관계자는 “어차피 부정수급 문제는 공공부조제도를 운영하면 늘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라며 “부정수급은 별도의 과제로 보고 따로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사회보험 강화·양극화 해소 동반돼야

학계에선 기초생활보장제도만 강화해서는 빈곤을 해소하기에 한계가 있으며 다른 사회보장제도와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진영 서강대 교수는 “복지제도가 발전한 외국에서는 기초연금이나 국민연금, 계층별 수당제도 등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계층에 폭넓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그간 기초생활보장제도로 일부 빈곤층만을 지원해왔다”며 “향후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기초연금 등 다른 사회보험제도의 발전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구조의 노령화에 맞춘 빈곤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초생보’만으론 빈곤 해소 한계

연금 등 다른 제도와 속도 맞춰야

양극화 해소 역시 중요한 과제


여유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송파 세 모녀의 사례를 들며 복지 사각지대 문제를 강조하지만, 현재 빈곤층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노인들”이라며 “연금제도가 부실한 상태에서 노인들이 빈곤에 떨어지도록 놔두고 기초생활보장제도 강화만으로 이들을 도와주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여 연구위원은 “현재로선 노인들이 받을 수 있는 연금 수준에 비해 생계급여로 받는 액수가 훨씬 많기에 기초생활보장제도만 강화하면 자칫 일하며 연금보험료를 내는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며 “결국 사회보험 등 다른 제도들도 받쳐줘야 한다”고 말했다.

양극화 해소 역시 중요한 과제다. 날로 심화되는 양극화는 복지 혜택을 둘러싼 계층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찬섭 교수는 “어느 사회든 양극화가 심해지면 최하층 바로 위에 있으면서 공공부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이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생계급여를 올리는 등 혜택을 확대한다면 이 계층의 반대가 극심할 수 있다. 양극화를 줄여 이분들의 생활도 개선시켜야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두고 벌어지는 형평성 논쟁이나 갈등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즈 끝>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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