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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노총각 탈출해야지"도 직장 내 괴롭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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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부 지침 발표, 7월 시행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K(40)씨는 지난해 사내 비공식 조직 '노총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노총련은 '○○회사 노총각 총연합회'의 줄인 말로 사내에서 나이가 많은 미혼 남성들의 모임을 부르는 말이다. 만 35세가 되면 직장 선·후배에게 등 떠밀려 강제 가입된다. 최고참 멤버가 지난해 결혼하면서, 그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K씨가 엉겁결에 회장이 됐다. K씨는 "처음엔 웃어넘겼는데 5년 넘게 '노총련' 소리를 듣다 보니 짜증 난다"며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회사에 오기 싫을 정도로 큰 상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는 7월부턴 이런 식으로 직장 동료를 놀리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돼 징계 사유가 될 수 있다. 고용노동부는 21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 매뉴얼'을 발표했다. 지난달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한 데 이은 후속 조치다.

이날 고용부가 공개한 직장 내 괴롭힘 유형은 16가지다. ▲개인사 소문내기 ▲음주·흡연·회식 강요 ▲욕설·폭언 ▲다른 사람 앞에서 모욕감을 주는 언행 ▲지나친 감시 등이다. 업무 평가나 승진·보상 과정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능력·성과를 인정하지 않거나 부서 이동을 강요하는 것도 해당된다. "무거운 것은 남자가 들어야지"라며 남자 직원에게만 힘든 일을 시킨다든가, 여직원에게만 다과를 챙기게 하는 것도 '젠더 괴롭힘'(성차별 괴롭힘)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사무직으로 들어온 직원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영업직으로 발령 내는 것도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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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기준은 '상식' 선에서 회사별로 자유롭게 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상사가 부하에게 "김 대리, 머리는 폼인가? 능력 안 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라고 막말을 하는 건 직장 내 괴롭힘이다. 하지만 신제품 발표회를 앞두고 "김 대리가 해온 디자인은 우리 콘셉트랑 전혀 안 맞잖아"라며 반복적으로 수정 지시를 하는 건 정당한 업무 행위다.

앞으로 상시 근로자 10명 이상을 둔 모든 사업장은 이 매뉴얼에 따라 오는 7월 16일까지 회사 안에 '괴롭힘 호소 창구·담당자'를 구체적으로 정해 사규에 명시해야 한다. 인사팀이 접수하게 하건 팀장이 접수하게 하건 그 회사 자유지만, 이런 창구 자체를 만들지 않는 건 불법이다. ▲예방 교육 ▲처리 절차 ▲가해자 제재 규정도 사규에 넣어야 한다. 따르지 않으면 사용자가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회사가 이런 규정을 만들기만 하고 모두 지키지 않는다 해도 그걸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근로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는데 회사가 묵살했다"고 고용부에 진정서를 넣으면 근로감독관이 이를 확인한 뒤 시정명령을 내리는 정도다. 고용부는 "기업이 사규를 통해 자율적으로 선진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가도록 독려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단,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한 직원에게 '복수'하는 행위만큼은 엄금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문제 삼은 직원을 해고하거나 인사상 불이익을 주면 사용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아무리 강제성이 없다지만 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악의적인 진정 때문에 조직 분위기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근로감독관을 응대하는 것도 회사로서는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지금까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해결해 온 일도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이 생겨 오히려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고 했다.

[주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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