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읽는 세상] 5.18, '민주화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아직도 5.18?
지난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5.18은 87년 직선제 개헌, 95년 전두환, 노태우 처벌로 마무리된 승리의 역사였고, 5.18 국립묘지 조성, 국가유공자 선정까지 국가차원의 예우와 배상이 완료된 역사로 기억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은 정확히 거기서 멈췄다. 군사독재에서 대의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의 불가피한 과거청산과 피해자 대책만 집행된 것이다. 이마저도 김영삼, 김대중 집권이 이루어지자 국민통합을 위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으로 마무리된다. 5.18에 대한 국가차원의 포괄적인 진상규명보고서는 아직도 없다. 국회청문회, 광주시 차원의 조사와 사료편찬 작업, 국방부 특조위와 같은 활동이 그때그때 진행됐을 뿐이다.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산출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 자행된 학살과 폭력의 전모를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5.18은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민주화' 운동의 동력이 되었지만, 같은 이유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라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직선제 개헌이 되고, 김대중 집권으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민주화'는 종결되었고 5.18도 정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5.18 망언'들이다.
20여 년 전에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졌더라도 지만원은 나타났을 수 있다. 하지만 전두환도 주장하지 않는 북한군 개입설을 이렇게 무식하게 들이미는 것은 한 사회가 합의 가능한 '사실'의 수준을 떨어뜨린다. 더 중요한 것은 지만원의 주장내용이 아니라, 그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확대 재생산하는 이들이다. 비록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5.18 피해자들은 더 이상 '폭도'라고 불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5.18을 국가기념일로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그런데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해 5.18을 모욕하고 자유한국당이 지만원을 국회에 초청할 때 5.18 피해자들은 구체적 공포를 느낀다. 당시 광주에서 싸웠던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5.18을 기억하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벌어지는 5.18 폄훼와 왜곡이 더욱 무섭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5.18에 관한 한 세월은 약이 아니다. 5.18은 과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당시의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세력이 가시화되고, 5.18 폄훼를 자양분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하는 현재의 문제다. 이번에 구성되는 '5.18 진상규명위원회'가 지연되어 온 과거청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게 아닌 2019년의 5.18 운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무엇이 5.18을 '과거'로 만드는가
'5.18 망언'은 2월 국회를 마비시킬 정도로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에게 5.18에 대한 태도는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가치이다. 각각 민주화 운동의 적자, 냉전 반공체제의 보루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5.18은 우회할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고 규정 짓지 못하는 사람들, 5.18을 국가기념일로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이 '소동'은 낯설 뿐이다. 5.18에 대한 정부 공식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광주사태', '광주학살', '5.18 민중항쟁'과 같은 여러 명칭이 경합했고 결국 '5.18 민주화운동'이 됐다. 이는 80년 5.18이 일으킨 한국사회 변혁의 물결이 '87년 직선제 개헌'이라는 대의민주주의로 정리됐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이었던 사람들에게 5.18은 '과거'일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도 87년 헌법을 부정하지 않는다. 김진태가 직선제 폐지를 외치는 것도 아닌 이상, 5.18은 정치권 '소동'에 그칠 뿐이다.
2019년, '민주화'된 세상에서 남의 돈 받아 일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의 단편이 어떠한가. 지옥 같은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은 생존을 위해 존엄을 내주는 거래가 일상이고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정말 죽게 된다. 성별, 학벌, 외모, 나이 뭐가 됐든 다른 이보다 나은 능력치를 극대화해 살아남아야 한다. 가해와 피해의 자리를 교차하며 이어가던 직장도 오래 일하는 건 쉽지 않다. 노동자는 언제든 쓰고 버리는 상품이 된지 오래다. 더 나이 들면,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 열악한 일자리들만 '선택'가능하다. 물론 자유롭게 투표도 가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킨다면 집회시위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화'된 세상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고 더 공고해졌다. 그러니 '민주화운동'인 5.18이 지금 무슨 의미겠는가?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로 폭력적으로 재편한 김대중은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배우게 했다.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 5.18은 그렇게 박제화 됐다.
우리 시대의 5.18
5.18은 '민중항쟁'으로도 불렸다. 변혁의 기운이 넘쳤던 80년대에는 '민중항쟁'이 5.18의 이름이었다. 70년대 소수 지식인-학생 중심의 반(反)유신투쟁과 달리 거리로 쏟아져 나온 다양한 계층의 광주 시민들을 드러낼 단어는 '민중'이었다. 열흘 동안 진행된 '학살'의 시간은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피가 뚝뚝 흐르는 적극적 '항쟁'의 시간이기도 했다. 5.18은 벌어진 '사건'의 규모나 내용 면에서 결코 '김대중 석방', '신군부 규탄'과 같은 구호로 제한될 수 없는 '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5.18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 박정희 피살과 신군부 쿠데타라는 정치적 격변이 가로놓여있지만 두 사건은 동일한 정치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70년대 말 오일쇼크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던 때, 유신체제의 위기가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로 현실화됐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구속자 중에 학생은 소수이고 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장노동자, 구두닦이와 같은 이들이 다수인 민중봉기로 부마항쟁을 서술한다.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잔인한 진압방식으로 공포감을 조성해 진압에 성공한다. 동일한 과정이 광주에서 반복되었고 학살로까지 이어졌지만 광주 민중들은 무장을 해 저항을 한 것이다. 그렇게 공수부대를 물리치고 잠시나마 광주를 해방시킨다. 이 모든 사건을 '직선제 개헌', '정권교체'와 같은 '민주화 운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물가는 30% 이상 뛰고 실업률이 치솟던 때, 누구도 불만하나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기에 터져 나온 시위는 '민주주의'와 같이 어렵고 경험조차 못해본 개념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인간존엄성의 요구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물론 다양한 계층이 함께 했던 만큼 5.18의 모습은 다면적일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과 학살에 맞서 싸우겠다는 실존적 결의는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지 않고서는 자신과 공동체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직관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는 민주적 제도나 협상, 폭력/비폭력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다. 사회적 자원을 많이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된다. 최후의 보루인 인간 존엄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경험을 더 자주 겪게 된다. 계엄군 진입 직전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 중에 저학력 계층이 훨씬 많았던 것은 그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않고서는 그 동안 짓밟힌 존엄을 회복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5.18 민중항쟁'이 2019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의 서사보다,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개인을 넘어선 연대 속에 가능한 공동체적 존엄의 가능성이 아닐까? 여전히 5월 광주의 폭력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지금 여기서 존엄한 인간으로 함께 살기 위해 연대하고 싸우는 수많은 우리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로 우리가 5월의 민중이다. 5월 정신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계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 속에 살아있다.
기자 : 정록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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