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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이념 벗은 현란한 복고 ‘디자인 조선’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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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온 메이드 인 조선’ 전

양파 과자·주방 세제·물수건·치약 등

1970년대부터 제품 변천사 나열

수작업에서 컴퓨터 그래픽 변화로

북한 사회주의 체제 이미지 벗어나

민족 예술 넘어 ‘탈이념’ 트렌드로

남북 민족 화해 분위기 전환되면서

북 미술 전반에 대한 국내 관심 늘어

서구권에서도 ‘희귀 아이템’으로 주목

”개혁개방에 변화·역동성 보이는 북한

미래 지향적 교류·시장 생성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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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건가?

착각할 정도다. 봉지들만 휙 보면 ‘양파링’ ‘새우깡’ ‘신라면’ 같다. 프린트된 때깔과 글씨체, 그래픽이 쏙 닮았다. 살펴보니 북한 제품임을 일러주는 재미진 한글 이름들이 붙어있다. ‘새우맛튀기’, ‘양파맛 튀기과자’, ‘즉석국수’….

‘옷물비누’는 우리 주방세제와 용기 모양새, 라벨 색깔이 거의 같다. 활력의 물이라는 ‘수소수’는 쭈쭈바의 새 버전으로 인기를 끈 치어팩 빙과 ‘설레임’의 팩 모양과 구별하기 어렵다. ‘손소독제’ ‘소독용 물수건’, ‘이 삭기 막아주는 치약’ 등등…진열장 속 웬만한 용품들이 우리네 쓰는 것들과 빼닮았다. 과거처럼 손으로 일일이 포장지 무늬를 그려 인쇄한 게 아니라 디지털 공정으로 작업한 꾸러미 디자인이다. 전문용어로 부드러운 벡터그래픽 디자인 기법을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현대 그래픽을 북한 일상용품에서 우리 제품들과 거의 같은 느낌으로 볼 수 있다니, 그네들 생활 디자인도 글로벌 표준으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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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이 북한 제품들이 지금 서울 대학로 전시장에 나와 있다. ‘영국에서 온 메이드 인 조선-북한 그래픽디자인’ 전이 차려진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지하 3전시장. 마지막 4섹션에 나온 지금 쓰는 북한 일상용품 컬렉션은 현란하다. 스낵, 세제, 통조림, 생수통, 심지어 여성들의 생리대 포장 디자인까지 판박이다. 소비사회의 디자인 문화에 젖어들었다는 의미일까. 분명한 건 과시하려 만든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시의 주역은 니콜라스 보너라는 영국 사업가다. 북한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북한을 20여년간 2백여차례 오가며 디자인제품, 미술품 1만여점을 사들여 구축한 컬렉션 가운데 200여점을 추렸다. 갖가지 제품들을 통해 1970년대부터 2010년 이후 지금까지의 북한 일상 생활 디자인 변천사를 보여준다. 손그림으로 선명한 색감과 명확한 기능을 강조했던 과거의 선전포스터 디자인부터 2000년대 이후 세계화, 디지털화 흐름에 발맞춰 변화한 생활용품, 만화, 티켓 등의 디자인 양상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북한 시각문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의 촌스런 이미지만 생각하고 있던 남쪽 관객들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다. 젊은 관객들은 70~80년대 선명한 오방색상과 선동적 글자체로 되어있는 생산독려 포스터나 얼핏 촌스러운 공연입장권, 비행기 티켓 디자인에도 ‘레트로(복고) 스타일이 매력적’이라며 반색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전시기획사의 김지현 팀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컴퓨터가 도입돼 북한 생활용품 디자인은 더이상 수작업을 하지 않고 디지털 그래픽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의 흐름을 전시장 안으로 들여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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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북·북미 정상 간 회담으로 한반도 화해 분위기 고조되면서 문화판에서는 북한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호기심이나 민족애 차원 아니라, 디자인 트렌드의 맥락, 컨템포러리(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일종의 취향과 트렌드 찾기의 대상으로 북한의 시각물을 보는 흐름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이념을 탈각한 관점에서 북한 디자인이 최근 전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레트로(복고) 디자인의 흥미로운 재발견으로 받아들이면서 마니아층도 생겨났다. 청년 미술인들이나 건축인들은 작업에 새로운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북한의 디자인과 리얼리즘 미술 작업을 재해석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부산비엔날레에선 개성공단의 북한 노동자들에게 지급된 초코파이를 거대한 더미로 놓고 함께 먹는 퍼포먼스를 펼친 작업한 천민영 작가의 대형 설치작업과 북한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지어준 기념 조형물들의 사진과 모형을 담은 최원준 작가의 작업이 나왔다. 지난해 11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전시공간에선 ‘북조선 판타지’를 주제로 젊은 작가 3명의 기획전이 열려 ‘김정은 피규어’ 등을 선보였다. 북한 피규어는 온라인몰에서도 일부 마니아를 중심으로 거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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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각문화의 관점에서만 보면, 북한 미술 자체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평가는 부정적인 면이 강했다. 획일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에 대한 한계가 지적됐고, 1990년대 이래 국내에 들어온 조선화 등의 일부 풍경화, 인물화 등은 상당수가 진위 시비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작품들로 논란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가동으로 북한의 시각문화 전반에 얽힌 이미지들이 남쪽에도 유포되면서, 북한 미술 전반을 민족예술 차원이 아닌 탈모더니즘 등의 색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생겨나고 있다. 2002년 탈북한 선무 작가는 한국에서 홍익대 미대를 졸업했고, 국내외 전시장에서 북한 체제의 이미지와 도상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여느 탈북인들처럼 이념에 착색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작법을 북한 이미지 속에서 녹여내는 독창적 작업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비엔날레와 대안공간의 단골작가로 자리 잡았다. 특히 경기도 화성군 매향리 옛 교회터 스튜디오에서 열고 있는 ‘반갑습니다’전(3월17일까지)은 이런 탈이념 탈모더니즘 코드에 부합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휑한 공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형 초상 석점만 걸어놓은 이 전시는 과거 북한 가정에 걸어놓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의 작법대로 세 지도자의 얼굴상을 엄숙하고 권위 있는 모습으로 패러디함으로써 국제 외교의 냉혹한 이면을 들춰낸다. 현재 열리는 ‘메이드 인 조선’ 전시도 말미 아트숍은 ‘불알전구사탕’ ‘풍계리강냉이’ 등의 북한풍 라벨을 붙인 먹거리들이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스타일의 공장 선반 스타일로 꾸려져 눈길을 붙든다. 북한 미술을 경직된 리얼리즘의 아류로 폄하했던 기존 미술인들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상상력 실험이 대중과 일부 청년 작가들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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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도 북한 디자인은 관심거리다. 10여년 전부터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북한 포스터 전이 열려 인기를 모았고, 전문 연구자들과 컬렉터들도 점차 늘고 있다. 북한 특유의 디자인 이미지들은 포스터를 중심으로 희귀한 수집 아이템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세계 유일의 고답적인 스탈린식 리얼리즘 미술과 전체주의 스타일을 고집해왔다는 점에서 희소성과 나름의 독창성을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드 인 조선’ 전만 해도 지난해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의 하우스오브일러스트레이션에서 열렸던 전시를 가져온 것으로 당시 현지 전시는 개관 이래 관객 규모가 최대였고, 언론의 집중조명도 받았다. 네덜란드에서도 빌렘 반데르 레일, 프란치스쿠스 브루르센 등 북한 미술 전문 컬렉터가 등장했고, 학계에서도 심층 연구가 이뤄졌다. 레이덴 대학의 경우 전문 연구강좌와 학술대회가 수시로 열릴 정도다. 영국에서 데이비드 히더와 더불어 양대 북한 컬렉션 소장자로 꼽히는 보너는 ‘메이드인조선’ 전시에 앞서 파이든 출판사에서 그의 소장품 도록을 발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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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체제 출범 뒤 북한 시각문화는 김일성 ·정일 부자의 컬러 채색상 건립을 필두로 생활용품 디자인의 혁신 등 유연하고 다채로운 방향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런 변화는 외부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이란 점에서, 좀더 냉정한 시각으로 그 배경과 맥락을 성찰하고 미래의 남북 이미지 교류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들도 나온다. 실제로 북한 미술이나 디자인의 경우 자체적인 내수시장이 없다. 오직 국가의 통제와 지침에 의해 공적인 수단으로 활용되며 판매도 국외 관광객과 수집가를 겨냥한 창구만 존재하는 까닭에 시장 차원의 소비적 맥락에서 섣불리 접근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 미술 매체 네오룩의 최금수 대표와 전영일 작가, 박계리 미술평론가 등 일부 진보계열 미술인들은 최근 남북한 시각물 분야의 전반적인 인적교류 추진을 목표로 ‘민족시각문화교류협회’란 조직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북한 문화 연구자인 박영정 박사(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는 “북한은 국가가 전적으로 생산 유통 등의 시각문화 전 과정을 통제하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최근 디지털 기법을 제품 디자인에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등 시장과 소비 차원에서 변화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며 “북한의 일상 시각문화에 대한 면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 등을 통해 학계·미술계가 앞으로의 교류와 시장 생성 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컬처앤아이리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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