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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저편에 고석바위가 우뚝 서 있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중략)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
- 장 슬로우. <세월의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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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마라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어느 순간 소스라치듯 놀라며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강물의 등을 떠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잠시 자리를 이탈한 별에게도 쉼 없이 충고랍시고 소음을 쏟아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를 둘러싼 대상들을 재촉하면서, 다른 속도를 알지 못하는 우매함은 늘 제 맘 같지 않음을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고 그렇게 누누이 스스로 떠들기도 하였고, 또 그보다 더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그것은 말뿐이었다. 체화되지 않은 막연한 인식이 그 한계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낮은 여울을 지나는 강물에게 계곡 상류의 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애당초 어울리거나,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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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비록 느려도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며, 그렇게 앞서가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차례차례 흘러가는 것이 그들의 삶이고 법칙이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탈 없이 멀리 가기 위해서는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강물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본 중에 기본임에도... 그걸 몰랐던 것이다. 설사 또 조금 더 앞서간들 그게 또 무슨 대수란 말인가.
강물이 큰물을 만나면 멈춰 있는 듯 보여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정중동(靜中動)의 흐름이 있고, 그것이 설사 느리다 하여도 그 흐름마저도 그들의 속도이며, 그것이 그들의 길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지하고 편협한 나로 인해, 속도를 탓하며 강물의 옆구리 깊숙이 박차에 찔리었던 나의 희생자는 늘 가까이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은 관심도 사랑도 아니었음을, 바위들이 즐비한 여울을 지나는 강물을 보며 깨닫는다.
하지만 앎과 행(行)함은 다른 것이니, 아직은 자신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저 강물이 그러하듯, 늦은 걸음이나마 묵묵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는, 마음으로 깨닫게 되는 그날이 올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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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울길, 강과 길은 언제나 동행이더라!
강을 따라 흐르던 길은 더러는 산을 향한다.
강과 길은 서로 같은 방향으로 흐르다가도 이따금씩은 제 갈 길이 따로 있는 양 서로 등을 보이며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길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웅변이라도 하듯 말이다.
산으로 향하던 길은 오래지 않아 이곳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의 흔적을 담고 있는 김임을 알려준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절벽 위로 도보 여행자를 위한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여울길'이라는 이름의 둘레길이 그 주인공이다. 이름이 말해 주듯 한탄강 둘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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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울길이나 한탄강 얼음트레킹길이나 출발점과 도착지는 같다. 협곡 위를 걷는 것과 그 아래를 걷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강과 둘레길은 서로를 외면하며 서로 다른 길을 향해 흘러가다가도, 이내 둘레길은 강을 잊지 못하고, 결국에는 강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협곡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걸으니 시야가 탁 트이며 한탄강 전체를 조망하며 걷는 즐거움은 있다. 그렇게 강 위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둘레길을 걸어보려 애써 산을 올랐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강 위의 사람과 산 위의 사람은 같은 곳을 향하는 동행이 되고 만다.
중간중간 만나는 갈래길은 이대로 쭉 가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강으로 갈 것인지를 묻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팍팍한 산길이 지루해질 무렵 못 이기는 척 강으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든다. 오늘의 테마는 얼음트레킹이었음을 애써 강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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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
문득 이런저런 길을 걸으며 방황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다양한 길에 대한 호기심이 방황은 아니었는지...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말했었다. 또 다른 누구는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도 말한다. 방황은 살아있다는 증거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실제 아무런 노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에게 방황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어느 낯선 길을 걷다 보면 한 두 번의 헤맴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길을 더듬어 걷더라도 가끔 길은 사람을 가고자 하는 길 밖으로 내몰기도 하기 때문이다. 길에게는 애당초 가야 할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그저 과정일 뿐, 그 길을 걷는 그 사람만이 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의 방향과 어긋남에 당황스러워하고, 또 투덜대는 것이다. 그렇게 방황은 걷는 이에게는 선택이 아닌 필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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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는 방황하며 헤매었던 그 길이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한다. 실망해서 주저앉은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방황이라는, 혹은 방황의 외피를 두른 '낯선 것'과의 만남은 그렇게 너무도 자주 '낯선 새로움'이라는 특별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 가다 보면 걷는 이의 마음 자세에 따라 길을 잃고 헤매는 그 과정마저도 새로운 길과의 만남일 수도 있음이니... 그냥 묵묵히 가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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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얼음트레킹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행사장이 보인다. 철원의 명물 중 하나인 승일교(昇日橋) 아래에 행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얼음을 이용한 다양한 조각상들이 있고, 얼음 터널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어, 감히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만 팽이를 돌리는 사람들이 보이자, 추억이 급~ 소환되는지라, 팽이채를 힘차게 휘둘러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몸으로 익힌 거여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팽이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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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일교를 생각하다
승일교를 즈음해 강을 벗어난 길은 강과 나란히 흐르고 있는 산 중턱으로 이어진다. 물론 계속 강을 따라 얼음 위를 걸어도 좋지만, 가끔은 땅도 그리운 법이다.
걷다 문득 뒤돌아본 승일교의 아치형 교각이 강심을 딛고 서 있다.
승일교가 아치형 교각으로 설계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승일교가 속해 있는 철원군 일원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의 실효지배 아래에 있었다. 북한의 노동당사가 철원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승일교는 러시아식 공법으로 설계돼 아치형 교각의 형태로 착공되었던 것이다. 착공 당시 다리의 이름은 '한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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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건설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공사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철원 지역이 수복된 후, 건설 주체가 바뀌어 1958년에 이르러서야 '승일교'라는 이름으로 준공된다. 승일교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의도와 무관하게 남북한 최초의 공동 합작사업의 결과물이라는 상징성 역시 승일교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 승일교라는 이름에도 설왕설래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김일성이 시작하고 이승만이 준공했다 하여, 그 이름자 중 한 자씩을 따서 승일교로 지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정설은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에 나포된 박승일 대령을 기려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현재 승일교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노후화로 차량은 지나다닐 수가 없다. 승일교의 대체 다리인 한탄대교를 이용해야 한다. 승일교랑 나란히 서 있는 빨간 철제 아치교가 한탄대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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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한탄강에는 얼음 위에서도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는 양 줄지어 걸어가는 그들이 가지런하다.
갑자기 얼음판이 왁자지껄하다. 등산용 의자를 썰매 삼아 썰매를 타는 사람들이 어린애 마냥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중년의 그들도, 역시 마음은 늙지를 않았나 보다. 다만 몸은 늙었는지 끄는 사람의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타는 이도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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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날씨가 따뜻한 탓에 한탄강 전 유역이 다 얼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얼지 않은 강을 건너는 방법은 부교다.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부교를 따라 걷노라면 다시 얼음으로 뒤덮인 강이 나온다.
얼어 있는 강심을 딛고 걷기도 하고, 더러는 강둑을 따라 걸으며 닿은 곳. 오늘 여정의 마지막이자 목적지이기도 한 고석정(孤石亭)이다. 강 건너 고석바위가 소나무 몇 그루를 머리에 인 채로 늠름하다.
이곳 고석정에는 조선 명종 때의 의적이었던 임꺽정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조 때의 실학자였던 이익(李瀷)이 그의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기도 했었던 임꺽정이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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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백정이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몰락한 농민과 백정들을 규합해 세를 형성하니, 이후 3년 동안 관군과 대적하며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많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는 일개 도적의 무리가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임꺽정은 짐승을 잡는 백정이 아닌, 유기를 팔거나 돗자리를 짜 내다파는 고리백정이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을 터. 관군에 쫓기다 다다른 곳이 이곳 고석정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임꺽정 무리들의 산채가 있었다고도 하고, 고석바위의 동굴 안에서 숨어 지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임꺽정을 기억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아스라한 설화만이 구전되어 전해질뿐이다. 인걸은 간 데 없고, 산천만 의구할 따름이다.
고석정을 벗어나면서 뒤돌아본 강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저 오늘 하루의 여정도, 어즈버!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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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3리 직탕폭포 가는 길(대중교통)
①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신철원행 버스 승차 → 신철원 시외버스터미널 하차 → 동송행 농어촌 버스 승차 → 장흥 3리 직탕폭포 하차
② 지하철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에서 동송읍행 시외버스 탑승 → 동송읍 터미널 하차 → 2번, 2-1번 버스 승차 → 장흥 3리 직탕폭포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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