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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낙태죄, 그 너머를 이야기하다 ③]낙태, ‘사회경제적 사유’만 허용하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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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낙태의 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합헌 결정을 이후 7년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임신중지(낙태)의 비범죄화 결정이 각국에서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 또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는 처벌로서 책임을 전가해 온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우리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임신이나 임신중지의 상황을 강요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누구나 포괄적인 성교육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변화가 이어져야 할까요. <성과재생산포럼>이 주 1회 총 다섯 번의 연재를 통해 그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합니다. 향이네에서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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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가 다양한 사회정의를 위한 요구와 연결돼 있다는 보여주는 그림. National Latina Institute for Reproductive Heal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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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라는 법의 존재가 얼마나 문제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것인지는 이젠 더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낙태죄의 존치냐 폐지냐를 넘어, 우리에게는 말 그대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필요하다. 국가가 임신중지를 전면 불법화하면서 특정 상황이나 집단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겠다고 한 지난 반세기는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 인권과 생명을 빼앗기도 했지만, 이러한 논리는 현실을 넘어 더 나은 논쟁을 하고 더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할 권리를 박탈해왔다는 점에서 문제다.

하나의 예로,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하기보다는 현행 모자보건법상 예외적 허용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지 관련 조항을 추가하자는 논리를 들 수 있다. 이 제안은 지금까지 낙태죄 폐지를 우회할 대안으로서 많이 제기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사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들을 필연적인 대상으로 하는가 등은 그 자체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논쟁거리다. 이 글은 다가올 헌재 판결 이후 피해갈 수 없는 쟁점들에 대해 토론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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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모두를위한낙태죄페지공동행동’에서 제작한 카드뉴스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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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사유가 은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안부의 동원은 ‘강제’가 아니었고, 위안부는 ‘공창’(매춘부)이었다”

이는 위안부 피해의 일본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우익의 전형적 논리다. 여기서 ‘강제’가 아니라는 것은 일본 군대가 총검을 들이대고 여성을 위협해 위안부로 모집하지 않았다는 논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더불어 갖가지 방식으로 여성들을 속여 모집한 것도 일본이 아닌 조선인 업자들이었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일본 우익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조선인 위안부든 모집업자든 간에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 놓여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수탈과 착취가 일상이 된 식민지에서 인적 동원은 일일이 총검을 들이대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물며 가진 것이 몸 밖에 없는 최하위층 조선 여성들은 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취업소개나 (인신)매매에 내놓아야 했다. 이러한 식민지·성(性)·경제적 상황 등의 중층적 작동 하에서 조선 여성의 선택을 단지 물리적 강제가 없었기에 ‘자율적’ 선택이라고 규정하고 일본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지 한국인은 익히 알고 있다.

어떤 집단에게 ‘선택’이나 강제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일본 우익의 논리처럼 중대한 모순을 야기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식민지나 전쟁 같은 거대한 역사적 예시를 떠올려야만 할까? 이미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개인들의 삶의 복잡성은 선택 또는 동의인지 아니면 강제인지 하는 단순 이분법으로 설명되지도, 포착되지도 않는다. 임신중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성적 행위와 임신중지라는 일련의 인간 행위와 삶의 과정이 오로지 개인의 ‘자발적’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자발적 선택인지를 맥락 없이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반대로 선택을 할 수 없다는 판단 역시 맥락 없이 작동하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이를 테면, 어떤 특정 집단 즉 10대, 장애나 질병이 있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성적 행위, 임신, 출산 등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자발적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전제되어 왔다. 모자보건법의 임신중지 허용 조항(제 14조)은 오랜 역사 동안 상징적이고도 물질적인 효력을 발휘해 왔다. 물론 해당 법이 표면적으로 임신중지를 강제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0대, 장애인, 빈곤층, 성폭력피해자 등에게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것은 이미 허용을 넘어 강제로 작동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발적인 선택을 할 능력과 권리 그 어떤 것도 애초에 인정되거나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진 수용시설에의 격리, 우생학적 강제불임시술 및 임신중절시술 관행이 ‘상식’이 된 역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굳이 더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의 경우,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사회적 상식 자체가 이미 강제와 ‘동의’의 이분법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강간 피해는, 특히 친족이나 남편에 의한 혹은 직장 내 강간 피해는 그들의 매일의 일상과 관계 안에 점철돼 있는 취약성과 폭력성 안에서만 발생된다. 즉 그들의 취약한 일상 관계는 강간 이전과 이후 또는 강제와 동의로 자명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중지가 허용 사유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해당 사건이 향후 법적으로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가 여부에 따른 절차 상 문제에 기인하며, 여기에는 (성)폭력의 일상성을 은폐하는 잘못된 강간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강간 피해가 발생하는 일상의 위계와 취약성, 폭력 자체가 많은 경우 피해자들에게 성폭력을 신고하거나 법적 절차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폭력으로 인한 임신은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하고, 피해자는 당연히 이와 같은 출산을 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상식은 자칫 피해자에게 강제가 돼 오히려 덫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긴요한 것은 성폭력과 그로 인한 임신이 한 사람의 사회경제적 삶, 취약성 그 자체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다.

결국 어떤 여성들에게는 임신과 출산이 자발성을 빙자한 강제적 임무로 부과되는 한편, 성매매여성, 성폭력피해자, 장애인, 비혼여성, 10대 청소녀, 빈곤여성 등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적 행위와 임신은 ‘비상사태’이자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한 논의를 단순히 임신의 유지 여부에 대한 개인의 선택 차원으로만 남겨둔다면 이 선택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의 사회적 맥락과 그에 대한 책임은 쉽게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그들 삶에 이미 만연하고 자연화 된 불평등과 권리의 박탈 상황 자체에 대한 철저한 무지이며, 또 그만큼이나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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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타이포그래피학교 실크스크린 동아리 ‘실커’에서 제작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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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우리는 이제 잘못된 선택지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 인간관계와 개인 삶의 복잡성을 단순하게 ‘A’ 아니면 ‘not A’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구획지은 것은 근대의 자유주의 및 제국주의를 뒷받침한 헤게모니 가부장제·남성중심주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공기처럼 편재하기에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성행위와 관계, 임신, 임신중지, 출산 등을 둘러싼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과 임의적 판단은 따라서 당장 철폐되어야 한다. 또한 그간 우리에게 주어진 좁은 틀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특정 집단 간의 위계를 짓는 논리를 우리 스스로 정당화해 왔을 수 있다는 점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잘못 구획된 선택지 안에서 자율이나 동의, 선택이 아니면 무능력이나 강제를 입증할 것을 요구받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 국가가 할 일은 처벌이나 허락이 아니며, 모든 사람(생명)의 존엄과 삶의 지속가능성을 확장해 나가는 일이다. 또한 낙태죄는 물론이고 기존에 법과 상식의 틀이 수많은 여성과 소수자들을 옭아매온 근본적 배제와 폭력에 대하여 자성하고 변화를 위한 방안, 구체적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의 권리를 확대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우리 사회가 함께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

필자소개

황지성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서울대학교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여성학과 장애학의 교차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역서로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공역), 저서로 <코다를 만나다>(공저, 근간)가 있다.


황지성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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