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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핵심협약 비준 ‘노력’만 하면된다”는 경총의 후안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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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친절한 기자들]

경총, 핵심협약 비준 필요성 축소 급급

경사노위 논의도 소극적 태도 보여

“비준 아니라 비준 ‘노력’만 약속했다”

‘노동후진국’ 오명에도 “벌금 없대요”

“한국 강성노조” 운운…속도조절 주장

한국노총 “처음부터 강성노조는 없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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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진행 중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오는 28일 막판 노사 합의를 시도할 예정입니다. 한국이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에서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해놓고 이행하지 않는다며 유럽연합이 분쟁해결절차에 돌입했는데, 오는 4월9일까지 한국의 가시적 성과가 없다면 분쟁해결절차 2단계로 넘어가거든요. 지난 26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는데, 요약하자면 “쫄지마세요. 핵심협약 비준 안 해도 괜찮아요”라는 내용입니다. 정말 핵심협약 비준을 안 해도 괜찮은지 <더(The) 친절한 기자들>에서 짚어봤습니다.

핵심협약 비준 ‘노력’만 하면 된다? 경총은 핵심협약 비준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축소하는 데 급급합니다. 한-유 자유무역협정 조항의 토씨를 따져가며 “비준 그 자체가 아닌, 비준을 위한 ‘노력’을 의무화”한 거라고 주장했어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언제 핵심협약 비준한댔어? 노력만 한댔지!”라는 거죠. 그동안 한국 정부가 유럽연합 공세에 대응해온 논리도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한-유 자유무역협정 조항이 핵심협약 비준을 강제하진 않지만,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한-유 자유무역협정 체결 뒤 8년 동안 한국은 핵심협약 비준 과제를 내버려두거나 전문가 연구용역·노사 토론회·사회적 대화 등의 방식으로 논의‘만’ 해왔거든요.

“노력만 해도 된다”는 경영계는 노력하긴 했을까요? 역시 아니죠. 경총은 매년 국제노동기구 총회에 사용자 쪽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단체입니다. 핵심협약 비준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회원사들을 설득하고 노동을 존중하는 ‘지속가능경영’의 중요성을 설파할 책임이 있어요. 하지만 경총은 손경식 회장부터 나서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해) 정부가 노조 쪽 주장만 수용해선 안 된다. 노사 간 힘의 균형을 회복해 기업의 과감한 투자 활동을 저해하지 않도록 경영계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경영계 스피커’ 역할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경총이 대기업의 이해만 대변해온 전경련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비판도 거셉니다.

경총은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에도 상당히 소극적입니다. 지난 18일 경사노위 공익위원단은 “경영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내밀어 논의 진척을 막는다”며 우려를 표했어요. 지난해 7월부터 경사노위는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입법 과제를 논의했는데 경영계는 꼭 필요한 단결권 관련 법 개정도 동의하지 않아 노사 합의가 불발됐습니다. 경사노위는 지난해 11월 공익위원안 형태로 단결권 논의를 일단 정리하고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경총은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과 같은 핵심협약 취지에 어긋나는 주장을 들고나오고 있습니다.

돈 나가는 일 없으니 괜찮다? 경총은 노동계·정부가 유럽연합을 앞세워 “불안감을 조성한다”며 ‘공포마케팅’ 취급을 합니다. 한-유 자유무역협정 상 일반 분쟁해결절차 2단계인 ‘전문가 패널’에 회부돼도 “양 당사국이 패널 보고서 이행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수준으로 규정”돼 있고 “특혜관세 철폐나 금전배상 의무는 없다”며 별일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경영계가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문가 패널은 한국·유럽연합·제3국의 전문가로 구성되는 독립적 기구입니다. 한국 정부의 손을 떠난 테이블에서 한국의 ‘자유무역협정 위반’이 공식화될 수 있는 거죠. 이는 법적·경제적 제재 이상의 타격입니다. 한국이 자유무역협정의 노동권 조항을 공식적으로 위반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로 역사에 남을 위기에 처했는데, 경총은 “여러분, 벌금 없답니다!”라며 안심하는 꼴입니다.

게다가 유럽연합이 ‘착해서’ 한국에 노동권 문제를 제기한다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자유무역협정에 노동권 조항을 넣는 건 최근 10여년 사이 만들어진 새로운 국제통상 흐름인 동시에 유럽연합이 국제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할 전략이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노동권 제도가 엄격한 유럽연합이 ‘공정경쟁’의 범위를 노동권으로 확대해 통상 압박의 수단으로 삼는 겁니다. 우리가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개발국가들도 비슷한 전략을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 국제적 기준이기 때문이죠. 유럽연합 통상부 장관이 나서 한국에 노동기본권 보장을 촉구하고 ‘무역의 품격’을 이야기하는 이유죠.

게다가 최근 유럽에는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이 확산하고 있는데요, 오는 5월 선거를 앞둔 유럽의회는 극우세력에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유무역협정 노동권 조항의 실효성을 높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이 자유무역협정에 정해진 제재를 넘어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을 압박할 거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조급할 필요 없는 ‘한국적 노동권’? 한국 상황은 유럽과 다르다는 것도 경총의 주요 레퍼토리입니다. 경총은 “우리나라는 (유럽과 달리)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와 대립적·투쟁적·갈등적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긴 호흡의 시간 설정 하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꼭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며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가 떠오릅니다.

아울러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와 대립적 노사관계는 지나치게 노동조합 활동을 제약하는 현행 노동관계법 탓이 큽니다. 한국노총도 이번 경총 공식입장에 대해 “처음부터 강성노조는 없다. 노동 탄압을 일삼는 강성기업에 맞서 노동기본권을 지키는 노동자들이 있을 뿐”이라고 맞섰어요. 지난 7일 한국을 찾은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도 “한국은 유독 불법 파업이 많다. 유럽 기준으로 보면 절차나 내용이 정당한 파업도 한국에서는 법·제도상 불법으로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며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갈등적인 노사관계는 핵심협약 비준을 미룰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빨리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취지에 맞게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핵심협약 비준은 한국이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할 때부터 국제 사회에 약속해온 오랜 숙제입니다. 유럽연합이 재촉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죠. 국제노동기구는 한국의 핵심협약 비준을 기대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는 6월 총회 기조연설을 요청하는 초청서까지 보낸 상태입니다. ‘국민소득 3만불’에 이른 한국은 노동기본권도 못 지키는 나라로 낙인 찍히기 전에 국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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