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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김종필·구인회·이병철이 감탄했던 나무들이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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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기른 나무 세종시로 옮겨 수목원 열어

나무 이사 3개월 걸려, 트럭만 1000대 동원

88세 고령에도 매주 4일씩 현장 나와 일해

"세상에 남길 건 이름과 손수 일군 자연뿐"

개장 10주년 맞은 베어트리파크 이재연 회장
중앙일보

베어트리파크 이재연 회장(오른쪽)과 장남 이선용 대표. 베어트리파크는 개장 10주년을 맞지만, 수목원의 나무 대부분은 이 회장이 50년 전부터 기르던 것이다. 사진은 베어트리파크 실내 식물원 '만경비원'.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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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여덟 살 노인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앉을 때나 걸을 때나 그는 반듯했다. 이따금 영어가 섞여 나오는 말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한국어·영어 모두 발음이 정확했고, 문장도 발랐다.

송파(松波) 이재연 회장. 세종시에 있는 수목원 ‘베어트리파크’ 설립자다. 40만㎡(약 12만 평) 규모의 이 수목원에 송파의 반세기 넘는 인생이 쟁여 있다는 사연을 들은 바 있었다. 베어트리파크는 4월 5일 개장 10주년을 맞지만, 수목원의 나무 대부분은 50년 전부터 송파가 손수 기른 자식 같은 존재거나 자식의 자식 같은 존재라는 내력 말이다. 장남 이선용(58)씨가 수목원 대표를 물려받았어도 개장 10주년을 핑계로 이 회장을 만나러 나선 까닭이다.

당신의 건강을 염려했는데, 다행히도 기우였다. 이 회장은 여전히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수목원에서 먹고 잔다고 했다. 아니 수목원 작업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분갈이를 하거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한다고 했다. 봄볕 바른 금요일, 그와 함께 수목원을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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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 야외분재원. 수천만원짜리 화분이 수두룩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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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건강해 보이십니다.

“평생을 나무랑 씨름하고 살았는데, 건강해야지. 건강은 타고났다고 했어요.”



Q : 기업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LG그룹에서 사장만 예닐곱 번 한 것 같아요. 40년 넘게 일했지. 1959년에 결혼했는데 그땐 한국은행에 다녔어요. 한국은행이 퇴근이 이르잖아. 저녁에 할 게 없더라고. 그때부터 아내(구자혜·1938∼2009)랑 집에서 양란을 키웠어요. 하나씩 양란을 사 모으다 보니 집에 작은 온실을 두게 됐어요. 농부 생활이 시작된 셈이지.”



Q : 처음엔 수목원이 경기도에 있었다면서요.

“지금의 의왕시에 있었지. 66년인가. 땅 2만 평(약 6만6000㎡)을 물려받았거든. 여기가 내 인생의 은행이었어. 단풍나무·은행나무·소나무 200여 그루를 심고 농장을 일궜지. 좋은 나무가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해왔고, 해외 출장을 나가면 씨앗을 받아 왔어. 일본·인도네시아 등 외국에서 사 온 나무도 많아. 베어트리파크를 빙 두른 느티나무 있지? 그게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느티나무야. 언젠가 창경원에 갔더니 관리원이 빗자루로 느티나무 씨앗을 쓸어내고 있더라고. ‘버릴 거면 나한테 버리시라’며 담뱃값을 쥐여 줬네. 그게 이렇게 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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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의 느티나무. 죽은 줄 알았는데 정성껏 보살피니 새 가지가 돋아났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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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그때는 개방하지 않았지요.

“입장객은 안 받았어도 손님은 많았지.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윤보선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등 유명인사도 많이 방문했어. 하루는 김종필 총리가 수목원을 둘러보고는 ‘소나무가 파도를 치는 것 같네’라고 하셨어. 그 말씀에서 아호 송파(松波)가 나왔어. 농장도 송파원이라고 이름 지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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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 송파원. 늙은 나무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들락거릴 정도로 이재연 회장이 가장 아끼는 공간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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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원은 베어트리파크에도 있다. 베어트리파크는 여남은 개 정원으로 구성돼 있는데, 야외 분재원 옆 정원이 송파원이다. 수목원에서도 나이 먹은 나무, 이 회장 말마따나 “같이 늙어가는 나무”가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가 하루에도 대여섯 번 송파원을 둘러 보는 이유다.

베어트리파크에는 현재 300여 종 11만 그루의 나무가 산다. 향나무가 5000여 그루로 제일 많고, 주목도 2000그루가 넘는다. 식물은 모두 1000여 종 40여만 점이 있다. ‘곰 나무 공원(Bear Tree Park)’이란 이름처럼 곰도 산다. 반달곰·불곰 합해 100마리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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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의 마스코트 반달곰. 반달곰이 사는 환경이 쾌적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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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수목원의 곰은 특이합니다.

“처음엔 곰을 키우는 조카한테 반달곰 10마리를 받았어. 지금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키워.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꽃이랑 나무 찾아서 오고, 아이들은 곰·사슴 같은 동물 보러 오고. 여기엔 식물이 아니라, 자연이 있는 거야.”



Q : 어쩌다 세종시로 오게 됐나요.

“의왕시가 개발됐잖아. 어쩔 수 없이 옮겼지. 89년이었네. 얼마나 힘들었던 줄 아시나? 나무 옮기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렸어요. 트럭만 1000대 넘게 동원했고. 수소문 끝에 여기 5만 평(약 16만5000㎡) 땅을 구했고, 조금씩 늘렸어. 원래는 소·돼지 키우던 황무지였어. 직원들이 정말 고생이 많았어. 송파원 직원들이 모두 내려왔었거든. 아직 꾸미지 못한 데가 더 많아. 그건 아들이 하겠지.”



Q : 개방은 왜 했나요.

“규모가 커지니까 운영비가 부담되더라고. 수목원이 내 인생의 은행이라고 했잖아. 내 인생은 물론이고, 전 재산이 들어갔거든. 운영비 마련할 생각으로 손님을 받게 됐어. 겨우겨우 꾸려 가. 나무 키워서 돈 벌 생각은 없고(베어트리파크 연 입장객은 20만 명을 살짝 웃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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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 이재연 회장(앞)과 이선용 대표. 이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수목원에서 뛰어놀았다. 수목원 살림을 물려받은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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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10주년이니 소회가 남다르겠습니다.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2009년 개장 사나흘을 앞두고 아내가 사고로 먼저 갔어요. 나나 아내나 개장 앞두고 정신없을 때였어. 저기 산에서 굴러떨어졌어. 개장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아들딸이 고집을 피우더라고. 그래서 문을 열었고, 오늘까지 왔어요. 내가 매주 여길 오는 건 마누라 보고 싶어서야. 일 안 하고 놀고 있으면 저 위에서 뭐라고 할걸? 10주년 행사는 나무 심기가 전부야. 수목원이 나무 심으면 됐지. 안 그런가? 신청자가 많아서 벌써 마감했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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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목에 핀 선인장 꽃. 베어트리파크 만경비원에 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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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망룡철화'라는 어려운 이름의 선인장. 남미산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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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틸란디시아. 집에 두면 미세먼지를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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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모아 포토 존을 만들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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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트리파크에서 눈에 띄는 나무는 주목이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또 천 년을 산다는 신비의 나무. 이 회장은 이름 말고 남길 건 손수 가꾼 자연뿐이어서 수목원을 일군다고 했다. 죽어서도 사는 주목 같은 말이었다.

“나무도 사랑을 줘야 하네. 나무가 잘 크면 사랑에 보답하는 거네. 사람도 마찬가지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게 되네. 우리 사회도 사랑을 주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어.”

세종=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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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주보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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