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각 기둥 단청 사이로 보이는 창경궁 명정전 [사진/조보희 기자] |
봄에 걷는 길이라면 당연히 꽃길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봄의 여신이 꽃길이라는 티아라(tiara)를 쓴 격이다. 여기에 밤과 궁궐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상급의 결합이다.
그런 완전체가 바로 이즈음의 창경궁이다. 집에서 창경궁까지는 걸어서 30분. 이웃 동네 놀러 가듯 창경궁으로 밤마실을 다녀왔다. 아내가 생일 선물로 사준 얇은 봄 잠바를 꺼내 입었다.
창경궁, 경복궁, 덕수궁은 밤에도 문을 연다.(저녁 8시까지 입장, 밤 9시까지 개관. 창덕궁 제외) 밤이라면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도 보이지 않을 터, 지금 이때를 놓치면 봄밤 꽃 대궐 구경은 내년으로 미뤄야 한다.
서울에서는 귀한 흙길이다. 마사토를 깐 탐방로는 운동화를 신고 걸어야 제격이다. 발바닥에 밟히는 왕모래알의 감촉이 까슬까슬하다.
명정전 뒤편에서 바라보이는 함인정(중앙)과 전각 [사진/조보희 기자] |
◇ 아직은 꽃봉오리…이달 중순에 만개할 듯
창경궁 봄꽃이 아직은 활짝 피지 않았지만,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4월에는 만개할 것이다.
정문인 홍화문 문지방을 넘어 바로 나타나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주변에는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들에 꽃이 피었다. 진달래와 개나리, 미선나무 가지에서는 갓난아기 같은 꽃봉오리들이 모락모락 솟아나고 있다.
통명전 뒤뜰에 활짝 핀 매화나무와 생강나무 [사진/조보희 기자] |
왕비들이 살았던 통명전 뒤뜰 나무들은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덕에 활짝 피었다.
연못인 춘당지를 에워싼 조명도 아름답게 빛난다. 연인도 좋고 부자나 모녀, 부부간에 청사초롱을 들고 소곤거리며 오손도손 걷기에 제격이다. 우리 곁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낭만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진달래 [사진/조보희 기자] |
◇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통명전
밤꽃도 좋지만 모처럼 역사 공부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밴 곳이니 건물마다 사연이 없을 리 없다. 가장 드라마틱한 곳은 왕비들이 살았던 통명전이다.
장희빈은 통명전 인근에 꼭두각시와 고양이 사체를 묻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 그 효과인지 인현왕후는 곧 숨졌고 희빈은 왕비가 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됐고 희빈은 그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받았다.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진 곳도 통명전 앞이다.
한 맺힌 사연이 곳곳에 배어있지만, 창경궁에 들어서면 아늑하다. 눈을 치켜뜨지 않아도 지붕 선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가 진 밤이면 하늘과 지붕이 맞닿는 공제선은 더 뚜렷해지고 고궁은 더 고즈넉해진다.
통명전 현판 [사진/조보희 기자] |
◇ 두툼해 튼실한 현판 글씨
궁궐 전각의 현판도 감상할 만하다. 조선 시대 임금들의 글씨다. 허벅지만큼 두툼한 붓글씨의 파임이나 삐침이 튼실하다. 먹물이 모자라 군데군데 갈필도 눈에 띄지만 자연스럽다.
균형 잡혀 깔끔하고 정갈한 구양순이나 안진경체도 좋지만, 살집 많아 든든하고 윤택한 이 현판 글씨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입구의 한글로 쓴 입간판 창경궁 글씨도 두고두고 봐도 물리지 않는 맛이 난다.
현판 대부분은 순조의 글씨지만 임금의 경연 장소인 숭문당은 영조가 썼다. 대부분 해서체지만 영청문이나 영춘헌처럼 전서체도 간혹 있어 나름대로 별미다.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과 창경궁 한글 입간판 [사진/조보희 기자] |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tsy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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