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3 (일)

"낙태는 죄 아니다" 66년만의 대반전···헌재, 헌법불합치 결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낙태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 결정이란 위헌이지만 바로 해당 조항이 무효가 될 경우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어서 일시적으로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이로써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처벌되어온 여성의 낙태는 66년만에 범죄의 굴레를 벗게 됐다.

"여성에게 임신에 따른 고통과 위험을 강제하는 것"
중앙일보

헌재는 임신 초기라도 특별한 사정 없이 낙태를 한 경우 이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것을 감안해 일시적으로 존속하고 법을 개정하라고 주문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헌재는 11일 오후 낙태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269조1항과 270조1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률을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 전까지 해당 조항은 유효하다. 형법 269조1항은 ‘부녀가 약물 또는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 270조1항은 ‘의사 등이 부녀의 승낙을 받아 낙태하면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모자보건법에 따라 임신으로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강간으로 임신된 경우 24주 이내에서 낙태가 허용된다.

헌재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처벌하는 이 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만 낙태를 허용한 모자보건법이 학업이나 소득·이혼 등 여성이 처한 다양한 사정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헌재는 “여성은 임신 유지로 인한 신체적·심리적 부담, 출산과정에 수반되는 신체적 고통·위험을 감내하도록 강제당할 뿐 아니라 이에 더하여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고통까지도 겪을 것을 강제당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며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했다”고 설명했다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를 단순하게 우선하는 방식의 논리는 “사실상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정 내지 박탈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22주 태아는 모체에 의존…모두 형벌로 다스릴 필요 없다"
중앙일보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또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면서도 초기에는 이를 꼭 형벌로만 보호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헌재는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에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실에서 낙태죄로 처벌받는 사례가 거의 없어 사문화된 점도 들었다. 헌재는 “모든 낙태가 범죄행위로 규율되면서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수술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해도 낙법적 구제를 받기가 어려우며, 비싼 수술비를 감당하여야 하므로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여성들이 적절한 시기에 수술을 받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낙태가 헤어진 상대 남성의 복수나 괴롭힘의 수단, 가사·민사 분쟁의 압박수단 등으로 악용된다는 점도 언급했다.

"즉시 낙태죄 효력 없애도 괜찮다"는 의견도
9명의 재판관 중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은 헌법불합치 결정 의견을 냈고,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은 이 결정에 동의하면서도 나아가 '단순 위헌'으로 낙태죄가 즉시 실효성을 잃게 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냈다. 이들 재판관은 "낙태죄로 기소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그 경우도 악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상당수였다는 걸 고려하면 이 조항이 폐기되더라도 극심한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조용호ㆍ이종석 재판관은 낙태 처벌이 합헌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두 재판관은 “태아는 인간으로서 형성되어 가는 단계의 생명으로서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인간의 존엄성의 정도나 생명 보호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태아와 출생한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태아의 생명권은 인간과 동일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다. 만일 낙태를 처벌하지 않으면 낙태가 더욱 많아질 것이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다른 수단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들었다.

7년만에 '위헌' 의견 4명→7명으로
헌재는 2012년 합헌 결정 이후 7년 만에 이를 뒤집었다. 앞서 헌재는 2012년 재판관 8명(1명 공석)이 참여한 결정에서 4 대 4로 합헌을 결정했다. 위헌 정족수 6명에 2명이 모자랐다. 당시 재판관들이 제시한 합헌 이유는 지금과 비슷했다. 헌재는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며 낙태를 처벌하지 않으면 낙태가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역시 예외적인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조항을 들며 “낙태 처벌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고 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후 헌재 재판관 구성이 바뀌었고, 2017년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가 위헌 여부를 다시 가려달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총 69차례에 걸쳐 낙태 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다가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헌법소원을 냈다.

박사라ㆍ이수정 기자 park.sara@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