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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게임중독연구 메타분석 (4) - 중독개념 앞의 학계, 미디어, 그리고 게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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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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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133] 우리는 앞선 글들을 통해 최근 5년간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디지털 게임 중독 혹은 과몰입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게임 중독을 확신할 만한 입장을 갖추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많은 연구들이 게임 중독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그 효과나 영향을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그 전제 자체는 여전히 많은 반론과 의심의 여지를 품고 있으며 학계 전반의 컨센서스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화는 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5월을 맞이하면서 관련된 이슈들도 간간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고 있는 추세다. 확인이 미처 완료되지 않은 사실이 정책과 제도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꽤나 위험천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 더 많은 관찰과 사고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현실로 다가온 게임 중독의 질병코드화 문제는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 자꾸 움직이는 것일까.

학계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거론될 필요가 있다. 게임 중독 혹은 과몰입이라는 개념 또는 현상은 다분히 다학제적인 영역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신경의학에서는 뇌과학의 방법을 통해 행동중독의 일환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이러한 질병코드 지정이 이끌어낼 사회적 영향력은 사회과학의 영역이기도 하며, 행동과 사회 관계라는 측면에서 심리학의 고민이 배제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의견과 관점이 통합적으로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척이나 부족한 편이었다. 자신이 속한 학문의 체계 안에서 완결성을 가진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더라도 그 현상이 더 많은 차원을 포괄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연구는 찾기 힘들었다.

센세이셔널한 연구 주제가 미디어를 통해 사회 전반에 '학계에 따르면'이라는 서두와 함께 유포될 때 해당 연구 결과가 갖는 한계와 맥락을 미디어에 풍부하게 다시 설명해줄 수는 없었는가? 이러이러한 전제하에서 진행된 실험이 전반적인 경향을 포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은 단지 논문의 끝에 인사치레로만 달아두는 용도로 활용되기만 했던 것인가? 매년 주기적으로 튀어나오던 '××××가 몸에 좋다 혹은 나쁘다'와 같은 단순한 결론이 미디어에 그냥 흘러나왔을 때의 문제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도의적 영역에서 책임 방기가 될 수 있다. 연구 결과가 이후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 또한 일정 부분 학계의 의무로 보아야 하고, 이 부분에서 게임 중독 이슈에 관한 학계의 책임이 존재한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디어의 책임이다. 수백 편이 넘는 연구 결과 중 센세이셔널하고 말초적 관심 유도가 손쉬울 주제들을 뽑아 가며 만들어낸 미디어의 게임 중독 담론은 명확하지 않던 무언가를 실체화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새로운 기술, 낯선 진보에 경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일말의 공포를 갖는 대중의 틈에 파고들어 미디어는 자신의 트래픽 장사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매체이자 테마를 중독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학계라고 모두가 탄탄한 연구 윤리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아니지만, 그런 것과 무관하게 미디어는 대중이 갖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슈들을 뽑아냈다. '뇌가 게임처럼 된다' '마약보다 무서운 게 게임이다' 같은 메시지들은 미디어의 얼마 안 남은 공신력에 의해 부풀려졌다. 연구의 의의와 한계를 되짚는 대신 결론이 센세이셔널한지 아닌지가 미디어에 인용되는 연구의 선정 기준이었다. 그렇게 학계와 대중의 거리가 멀어졌고, 마치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디지털 게임은 제2의 바보상자,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중독재의 일부로 낙인찍혔다.

단지 학계와 미디어뿐일까. 산업계는 게임중독이라는 말의 잔치에서 늘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온전하게 책임 없이 억울한 비난을 당한다고만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불분명한 중독 개념으로 비난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 국내 주요 게임사들이 뽑아내는 성과들은 대체로 높은 사행성과 과도한 선정성에 중심을 두는 게임이었다. 중독 문제로 게임사들이 비난받을 때 꺼내던 변호 논리였던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게임사의 홍보실 메시지와 실제 제작된 게임의 괴리는 컸다.

어떤 면에서 한국 게임사들은 미디어들이 쏟아낸 중독 담론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근거를 자신들의 결과물로 제공한 측면이 존재한다.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오는 많은 재미들이 생략되어 짧은 시간에 높은 회전률로 매출이 들어올 수 있는 결과 중심+현금 투여의 경로가 주력 상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문화' 라는 단어는 각 게임사의 퍼블릭 메시지가 무색할 정도로 생략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게임 중독이 불확실한 근거에 기초한 상황임을 이야기하더라도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로 중독과 평행선에 서는 게임들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될지 모를 일이다.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유령 하나가 이름을 얻고 의미를 달아 한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제 그 영향력은 일종의 제도화에 오를 듯한 움직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 도달하기까지 관여한 많은 분야들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 하나하나가 쌓인 결론일 것이다. 각 분야의 개개인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성과 중심주의에 휘말려 짧고 제한적인 연구 결과를 빠르게 뱉어내야 했던 학계, 고전적 매출 구조가 변화하면서 오로지 트래픽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미디어, 문화 콘텐츠로 인정해 달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중심 수입원이 강한 사행성을 보장하는 게임들임을 벗어날 수 없는 게임사의 문제는 어쩌면 이 시대, 이 상황이 가진 전반적인 사조의 문제이며 게임 중독 이슈는 따라서 어느 정도 동시대의 거시적 흐름이 이끌어낸 결과물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류는 실수하는 존재다. 오랜 세월 놀라운 진보를 거듭해 왔지만 그 과정이 일직선으로 보편적인 인류의 향상만을 향해 온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이권 때문에 다른 인류를 죽였고, 신의 이름을 빌려 타 종교의 신도를 학살했으며, 시장을 키우고 이윤을 남기기 위해 남의 영역에 들어가 식민지를 만들고 착취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수하는 존재라는 말의 성립 근거는 과오를 실수로 받아들이고 고쳐나갈 줄 안다는 말에 있기도 하다. 한때 책이 토론의 방해물로 지목되고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평가가 뒤바뀌어온 것처럼, 오늘의 게임 중독 이슈도 지금 이대로 고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예측이자 동시에 희망이다. 오늘의 이 이슈가 후대에는 웃고 즐기며 '이런 일도 있었지'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또 인류이기도 하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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