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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기고] ILO 조약 비준, 급할수록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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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 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노사정 대립이 심해 사회적 대화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노동계는 조약 비준에 늑장을 부릴 경우 경제적 불이익은 물론 국가 신뢰도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에 대해 경영계는 관련 법 규정 개정 없이 조약 비준을 하게 되면 노사 간 힘의 균형이 깨져 산업현장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견을 보이는 곳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조약'(제87호)과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조약'(제98호)이다. 이는 ILO가 지정한 기본 8조약에 속하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조약(제29호·제105호)과 더불어 아직도 비준하고 있지 않다. 전자는 필라델피아 선언에 기초해 노사는 사전에 허가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단체를 자유롭게 설립·가입·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후자는 노동조합의 가입·탈퇴를 고용 조건으로 하거나 정당한 노조활동을 이유로 한 불이익 처우, 지배 개입 및 경비 원조 등을 금지하는 소위 부당노동행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두 조약은 노동권에 관한 기본 원칙을 선언한 '핵심 조약'으로 모든 회원국에 비준 의무를 부과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사유 제출과 동시에 비준을 권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수차례 권고를 받은 바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해고자 등에 대한 조합원 자격 제한 폐지를 비롯해 노조전임자에 대한 급여 지급 금지 및 근로시간 면제(time-off) 개선, 노조 설립제도 및 공무원에 대한 노조 자격 제한 폐지 등 현행 법제나 판례와 배치되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경영계는 ILO 측 요구는 허들이 너무 높을 뿐만 아니라 산별노조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기업별 노조 중심인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몇 가지 전제조건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조건으로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을 비롯해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삭제, 직장 점거 금지 등을 들고 있다.

한편 문재인정부는 공약사항으로 ILO 기본 조약 비준을 제시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그 역할을 위임했다. 하지만 위원회 구성 단계에서부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익위원 구성이 노조에 편향돼 있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위원회는 시작부터 삐꺽거리더니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렬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조약 비준을 더 미룰 경우 경제적 불이익은 차치하더라도 '노동권 후진국'으로 낙인찍히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사가 어렵게 사회적 합의를 한다 해도 국회 동의를 얻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우선 기본 조약을 비준한 다음 입법을 하자는 '선비준 후입법'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ILO 조약 비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조약 비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행 노동관계법에는 ILO 조약과 상충하는 내용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선결 없이 비준을 서두르는 것은 더 큰 혼란과 시행착오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 법제를 꼼꼼히 따져보면 ILO 기본 조약이 규정하고 있는 노동기본권과 부당노동행위 등 상당 부분은 이미 반영하고 있다. 단지 기본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노동기본권이 사실상 부정되고 있는 나라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올해 ILO 창립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6월 ILO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다. ILO의 기념비적인 날에 대통령이 총회에서 연설을 하는 것은 의미 있고 축하할 일이다. 그렇다고 이를 위해 조약 비준을 서두르는 것은 정치적 행위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이정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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