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결핍에 시달리는 당신, 태안에서 치유할 수 있다. |
[태안=글·사진 | 스포츠서울 이우석 전문기자] 현대 서울 수도권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겐 기본적으로 바다결핍증이 있다. 강원 영서 등 내륙인은 물론 일부 부산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질환(?)이다. 얼마동안 바다를 못보고 살면 삶이 핍박해지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등 다양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듯 하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데 기하학(도형학)적으로는 ‘수직(垂直)’에 대한 과잉섭취 탓으로 해석될 수 있다. 너무도 수직 구조물이 많은 도시에서 지내온 탓이다. 가만 보자. 최근 몇 주간 한번이라도 ‘방해받지 않은 평행’을 본 적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런 호사는 누린 이는 드물 것이다. 비타민도 그렇듯 인간은 이를 자연에서 섭취한다. 특히 산지 지형이 많은 국가에 살면 지평선이 드물어 이를 바다 수평선(水平線)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수직선과 수평선의 한자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태안은 넓은 바다와 풍부한 해산물을 품었다. |
다행히 바다는 많다. 리아스식 굴곡이 많은 대한민국 해안선의 길이는 1만4963㎞(2014년 행정안전부)로 지구 둘레(4만192㎞)의 약 37%에 해당한다. 수도권 기준 가깝게 서해안부터 남해안 동해안,제주도 북태평양 등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바다를 품고 있다.
가까운 바다, 서해안 태안을 ‘처방’하면 당장에라도 효험을 볼 듯해 단숨에 달려갔다. 바다결핍에 특효라는 수평선은 물론 멋진 풍광과 맛난 해산물은 덤이었다.
보석같은 색을 발하는 봄바다. 태안에서 만날 수 있다. |
◇바다 일번지 태안
서해안 수많은 바다가 있지만 태안은 더욱 특별하다. 태안은 반도이기 때문이다. 길죽한 안면도(이젠 섬이 아닌)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서해의 한복판에 위치했다. 해안선이 무척 길다. 사실 ‘바다 포화’ 상태라 할 수 있다. 무려 4면을 바다와 접한 태안군에 559.3㎞ 해안선과 도서 119개, 항·포구 42개가 있다. 해수욕장 만해도 29개다. 중증 바다결핍의 치료지로서 딱이다. 한마디로 간이 안좋은 이들 주변에 밀크씨슬 2000㎎ 짜리가 가득 널려있는 셈이다.
태안(泰安). 나라가 태평하여 백성이 안락하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나온 말이다, 보통명사로서 뜻도 같다. 어찌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을까. 세곡선과 무역선이 지나던 뱃길(조운로)이 있고, 이곳 물살이 빠르고 험해 지나는 배의 무사안녕을 바랐던 곳이기 때문이다.
해수욕장도 29곳이나 된다. |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지만 태안군은 30년 전에야 비로소 복군됐다. 일제강점기 1914년부터 1989년까지 서산시에 편입되었던 탓이다. 고려시대에도 그랬다. 해상 조운로였던 태안군은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1373년(공민왕 22) 서산으로 치소(治所)를 이전한 바 있다. 태안은 조선시대에도 폐군되었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숱한 상실에도 불구하고 태안은 묵묵히 바다를 지켜왔다. 황금어장에서 나오는 풍부한 해산물로 게장과 게국지 등 독특한 고유 음식 문화를 만들었고 자염(煮鹽)이란 전통 특산물까지 남겼다. 그 정체성을 잃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고불고불한 리아스식 해안에 죽죽 키가 껑충한 솔숲, 키작은 곰솔 등 수려한 풍광과 맑은 바닷바람은 태안의 상징이다.
안흥성은 군사요새로서, 또 바다전망대로서 수백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안흥성 성내 태국사 절에서 바라본 바다. |
도착하자마자 태안 바다를 보러 안흥성에 올랐다. 정죽리 안흥성(찐빵과는 아무 상관없다)은 조선 제17대 효종 6년(1655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석성이다. 둘레가 1㎞가 넘고(1568m), 최고 높이는 3.5m로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해서 지었다. 성곽 일부와 4개 성문이 남아있는데 북문으로는 마을과 농지, 호국사찰 태국사 쪽에선 인근 관장목부터 먼 바다까지 보인다. 천혜의 요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성내 건물이 소실됐으며 지금은 문화재(충청남도 기념물 제11호)로서, 또 관광 전망대 역할도 하고 있다.
안흥성 북문. |
안흥성 아래 바다는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이곳 바다에서 유물이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을 오가던 많은 무역선이 좌초했고 큰 불행은 훗날 해양 유물로 남아 후손에게 전해졌다. 인근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선 해양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 해양유물 10만여 점 중 무려 2만5000여 점이나 보유한 곳이다. 고려청자를 실어나르던 태안선과 마도 1~4호선 등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한 1100년 전 고려시대 유물을 비롯, 조선시대 유물까지 전시했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옆 안흥나래교 |
신안 유물과는 달리 태안 유물은 주꾸미가 일등공신이다. 지난 2007년 한 어선이 청자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주꾸미를 잡아올렸다. 한눈에 봐도 고려청자. 긴급탐사에 들어가 발견한 것이 바로 태안선이다. 이후 마도 1~4호선까지 보물선이 줄줄이 발견됐다. 발굴과 탐사를 통해 태안 앞바다가 조운로였으며 무역로,외교항로였음을 알게 됐다.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
출토 선박에선 청자모란 연꽃 무늬 주전자,청자모란 무늬 베개 등 진기한 문화재와 함께 볍씨 청동제숟가락 빗 국자 등 생활유물까지 나와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타임머신’이 되었다.
바다에 떠있는(?) 절집 태안 안면암. 물이 들어오면 부상탑(가운데)도 떠오른다. |
◇반도와 섬, 바다종합선물세트
태안에서 가장 유명한 곳 안면도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지형이다. 원래 섬이 아니었다가 섬이 되고 또다시 육지가 됐다. 반도 안면곶이었는데 1638년(인조 16년) 세곡을 나르기 위해 중간에 운하를 파서 섬을 만들었다. 당시로 대규모 국책 사업이었다. 330여년을 섬으로 지내다 1970년대 다시 안면대교가 놓여지며 육지가 됐다.
태안 안면암은 부교로 연결된다. 물이 빠지나 차나 이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
이곳에 안면암이 있다. 여우섬까지 부교로 연결된 사찰 안면암은 그 풍경이 기막히다. 이 호젓한 가람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원효대사는 고사하고 1998년에 지었으니 이제 갓 스무해를 넘긴 ‘청년’ 사찰이다. 3층 목조로 지은 안면암에는 신도도 많이 찾지만 사진작가들이 단골(?)이 됐다. 부교 다리를 지나면 바다 위 갯벌 위를 걷는 셈이다. 특히 썰물에는 칠게 등 다양한 해양생물을 관찰할 수 있어 살아있는 자연생태 체험장이 된다.
태안 해수욕장은 물이 맑다. 서해 쪽으로 한참을 툭 튀어나왔으니 그냥 육지 해변보다 맑은 물을 담고 있다. 괜히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다. 바다를 찾아 온 관광객이 많으니 근사한 숙소도 카페도 많이 들어섰다. 안면도 꽃지해변은 늘 여행객으로 붐빈다.
태안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에서 즐기는 갯벌 체험 |
꽃지 인근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은 청정 갯벌 생태체험과 바다낚시 등 다양한 어촌체험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건간망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미리 그물을 설치해 놓고 밀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를 잡는 방식으로 독살의 원리를 반대로 적용한 것이다. 마을은 천혜의 숲과 아름다운 오솔길이 있어 데크길을 따라 편하게 해안가를 둘러볼 수 있다.
태안 병술만 어촌체험 마을 김발 작업 |
이 마을은 역사가 깊다. 병술만 마을은 고려 때 몽골에 항전하던 삼별초가 강화도로부터 내려와 수개월 동안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고려 원종은 몽골과 화의(1279년)하고 송도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 지휘관 배중손은 왕족 ‘승화후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병술만에 주둔하며 무인 정권을 수립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병술안(兵術岸)이라 불렸다. 당시 주변 지명은 발검배(拔檢·검을 뽑다),목축곡(牧畜谷·말을 기르는 계곡),둔두리(屯頭理·주둔지의 진),들마당,줄밭머리,망대 등 군사용어였다.
옹도는 유인등대섬으로 100여년 간 등대지기를 제외한 민간인이 통제되던 비밀의 섬이었다. |
좀더 푸른 바다를 눈에 담고 싶다면 섬으로 떠나면 된다. 안흥에서 배가 출항한다. 옹도는 일명 등대섬이다. 지난 2013년,무려 106년 만에 입도를 허용한 신비의 섬이다. 망망대해에 외로운 섬 하나, 등대 하나 달랑 서있던 곳이다. 등대지기 만이 입도할 수 있던 곳에 이제 유람선이 뜬다.
옹기를 닮았다는 옹도는 영락없는 고래 모양이다. 바다에 흔해 빠진(?) 고래보다 오히려 옹기가 귀하던 시절 붙인 이름인듯 하다. 선착장에 내리면 뱃길에 지친 이들을 토닥이는 쉼터가 있고 동백꽃 터널 등을 지나 섬에 오를 수 있다. 곳곳에 쉼터가 있어 푸른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중앙광장을 거치면 오랜 역사의 등대를 올라갈 수 있다. 등대에는 전시관도 있어 섬과 바다 모양을 본 뜬 디오라마 등을 통해 서해의 아름다운 섬을 눈에 담아갈 수 있다. 옹도에서 단도 가의도 등이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최서단 격렬비 열도까지 볼 수 있다.
괭이갈매기의 섬 난도 |
알을 닮았다는 난도(卵島)는 입도할 수 없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334호)인 탓이다. 이곳에 주로 사는 동물은 괭이갈매기. 우는 소리가 마치 고양이 같대서 괭이갈매기다. 5~8월 번식기에 난도를 찾아드는데 최대 2만 마리가 넘는다.
기나긴 곶과 외딴 섬,태안의 바다는 이처럼 다양하다. 태안에서의 하룻밤,어느새 결핍은 사라지고 처방에 더한 맛난 해산물로 두둑한 배가 남았다.
demory@sportsseoul.com
천리포수목원. |
태안여행정보
●둘러볼만한 곳=태안은 바다 이외에도 꽃과 솔숲으로 유명하다. 꽃지해변과 천리포수목원,청산수목원에 튤립 목련 야생화 홍가시나무 등 꽃으로 가득하다. 곧 떠나버릴 2019년의 봄을 인증하는 인생샷을 남길 수 있다. 바다와 솔숲을 돌아보는 해변길(샛별길 바람길)이 있다. 태안해안국립공원 꽃지해변에서 황포항까지 이어진 약 13㎞길(약 4시간 소요)로 바다향기와 숲의 피톤치드에 도시병이 치유된다. 해변길 5코스 노을길은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약 3시간40분 소요)이다. 대부분 평지라 온 가족이 힘들지않게 걸을 수 있다. 이도 부담스럽다면 기지포 해변~두여전망대까지 왕복 1시간30분 만 걸어도 좋다.
오월의 꽃게찜. 서해수산 |
●먹거리=태안은 풍요의 바다에서 올린 다양한 바다먹거리가 많다. 제철 꽃게는 물론 대하 주꾸미 간재미 실치 우럭 해삼 등 가짓수도 많다. 태안에서 대하 정도의 새우는 그저 국물내기용이었나 할 정도다. 밥도둑의 원조 격인 간장게장은 태안이 ‘패권’을 가졌다 자처한다. 달콤짭조롬한 간장에 재운 암꽃게 속에는 샛노란 알이 한가득 들었다. 밥을 비비면 세상이 제것이 된다. 쪄도 맛있고 탕을 끓여도 좋다. 시원한 국물에 특유의 게향이 서려 숟가락이 쉴 겨를이 없다. 게딱지가 인원수대로 나온다면 다리부터 맛보고 나중에 챙겨먹는 것이 좋다. 어차피 ‘굳은자’다. 솔밭가든이 잘한다.
간장게장(솔밭가든) |
우럭젓국이 기막히다. 탕거리로 이름난 우럭을 꾸덕꾸덕 말렸으니 그 진한 맛이 더하다. 뽀얗게 우려낸 국물에 칼칼한 청양고추채를 살짝 넣고 떠먹으면 해장용으로 그만이다. 두부와 무를 넣어 한층 담백하고 시원하다. 반찬맛도 좋은 만리포식당(읍내)이 잘한다.
우럭젓국(만리포식당). |
고려청자를 건져낸 공이 크지만 주꾸미는 태안에서 즐기는 메뉴다. 보통 샤부샤부로 먹는다. 마늘과 대파를 넣고 말갛게 끓인 육수에 살짝 익혀 다리부터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된다. 야들야들하고 졸깃한 식감이 아주 좋다. 운좋으면 대가리(사실은 몸통)속 쌀밥처럼 생긴 알까지 맛볼 수 있다.
전통 가정식 게국지는 간장게장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남은 게장 국물에 묵은 김장김치나 푸성귀를 넣고 팔팔 끓여 먹는다. 짭조롬하고 새콤한 맛이 침샘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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