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글로벌 공급망 핵심 기지로 급부상
"1월 트럼프 발언 듣고 생산 시설 이전 결심"
10일(현지시간) 미·중 고위급 무역 협상이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끝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대로 미 무역대표부는 3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절차에 돌입했다. 중국을 겨낭한 ‘관세 폭탄’ 열차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중이 한치 앞을 보지 않고 충돌하는 가운데, 베트남이 ‘반사이익’으로 활짝 웃고 있다. 주요 제조업체들이 미국의 관세 폭탄을 피해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납품처를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가뜩이나 중국의 인건비 상승이 부담스러웠던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외국인의 베트남 직접투자(FDI)도 크게 늘어나는 등 미·중 무역 전쟁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4월 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응웬 쑤언 푹 베트남 총리(좌측)와 리커창 중국 총리(우측)가 만난 모습. 사진=연합뉴스/AP통신 |
◇ 중국에 있다 보복 당할라...줄줄이 베트남행
2018년 10월 애플의 ‘에어팟’ 생산업체로 유명한 고어텍(GoerTek)은 무선 이어폰 생산 시설을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 회사 고위 관계자는 "날로 첨예해지는 미·중 무역 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며 생산 거점을 바꾸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조립업체 폭스콘도 최근 베트남 북부 산업단지의 부동산을 취득했다. 폭스콘은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자마자 중국 광둥에 생산 기지를 만든 이 지역 터줏대감으로 애플의 최대 납품업체다. 그런 폭스콘도 미·중 무역 전쟁 장기화에 대비하고 있다.
홍콩 유안타투자컨설팅의 제임스 웨이 애널리스트는 "중국이 미국 기업에 보복하려고 한다면, 애플은 가장 확실한 타깃"이라면서 "애플과 애플의 핵심 협력사들은 매우 불확실한 정치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중국 레노버 그룹도 베트남 북부 박장에 대규모 공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당국과 협상 중이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제품 대부분은 미국으로 수출될 예정이다. 10년 전 휴대전화 생산 거점을 한국의 구미에서 베트남의 박닌성으로 옮긴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 중국 휴대전화 공장 2곳 중 1곳을 폐쇄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베트남과 인도에 생산 물량을 집중시키려는 조치로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첫째)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왼쪽 첫째)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12월 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호텔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참모진과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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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운동화’로 잘 알려진 브룩스러닝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브룩스러닝은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보유한 회사 중 하나다. 이 회사 짐 웨버 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운동화에 대한 관세를 20%에서 54%까지 올리겠다고 위협했을 때 중국의 거의 모든 생산 시설을 철수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현재 브룩스 생산물량의 55%를 베트남 공장이, 45%는 중국 공장이 담당한다. 웨버 CEO는 "앞으로 베트남 공장이 브룩스 생산량의 65%를 담당하고 중국 공장은 10% 가량만 맡게 될 것"이라면서 "나머지 25%를 생산할 제3국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중국 내 브룩스 일자리 8000개가 없어지고 대부분 베트남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소식통에 따르면, 아디다스도 신발류의 납품처를 중국 기업에서 베트남 기업으로 바꿀 예정이다.
베트남 세관에 따르면, 베트남의 올 1분기 신발 수출액은 3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4.1% 증가했다. 유럽연합(EU)이 가장 큰 시장이었고, 그 다음이 미국이었다.
◇ 베트남은 ‘뉴 광둥’..."라벨 세탁이라도 하자"
전문가들은 베트남이 ‘제조업의 메카’로 불리는 중국 광둥 지역을 대체할 ‘뉴 광둥(New Guangdong)’이 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 광둥 지역은 임금 인상과 각종 규제로 매력을 잃는 반면, 미·중 무역 전쟁의 장기화로 글로벌 기업의 베트남행은 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직물 셔츠 생산업체인 에스퀄(Esquel)의 위키 웡 관리 이사는 "15년 전 베트남에 왔을 때는 근로자 쟁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수년 동안에는 그런 문제는 없었다"면서 "근로자의 숙련도도 높아져 생산성이 향상되고 있다"고 전했다.
2014년 11월 하노이 삼성전자 베트남 생산법인(SEV)의 휴대전화공장에서 작업 중인 현지 종업원들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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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의 베트남 진출은 다른 글로벌 기업의 진출을 부르는 연쇄 효과도 낳고 있다. 올초 미국의 항공기 부품업체 어메리칸 유니버설 알로이(American Universal Alloy)와 전자제품 제조업체 알톤인터내셔널엔터프라이즈(Alton International Enterprises)도 생산 기지 설립을 위해 다낭에 문을 두드렸다. 스웨덴 가구 기업 이케아도 최근 4500만 US달러를 투자, 이케아의 동남아 거점을 하노이에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지난해 베트남의 외국인직접 투자액(FDI)은 190억 US달러에 달했는데, 올해는 이보다 더 증가할 전망이다. 올 1분기 베트남의 FDI는 108억 US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86.2%나 증가했다. 중국 관영 매체 시큐리티타임즈에 따르면, 1분기 FDI 중 중국 기업이 투자한 금액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FDI의 증가는 베트남 경제의 호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8년 베트남의 경제 성장률은 최근 10년간 최고치인 7%에 달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는 지난 4월 베트남 국가신용등급을 ‘BB-‘에서 ‘BB’로 상향했다. S&P가 베트남 신용 등급을 상향한 것은 2010년 이후 10년 만이다. 또다른 평가사 피치도 9일 베트남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상향한다고 밝혔다. 피치는 올해 베트남 경제 성장률을 6.8%로 전망했다.
당장 중국의 제조 공장을 베트남으로 옮기기 부담스러운 기업들은 제3국, 특히 베트남을 경유해 미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을 ‘메이드 인 베트남’ 라벨로 바꿔 미국의 관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다. 베트남에 물류 창고를 빌리는 방법이 가장 대표적인 ‘라벨 세탁’ 방법이다.
베트남 호치민의 데잔시라앤어소시에이츠(Dezan Shira & Associates’) 맥스필드 브라운 수석 부사장은 "다수 고객이 베트남으로 상품을 운송하고 라벨을 바꿀 수 있는지, 미국 정부가 이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는지 물어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중국산 철강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매기기 시작한 후,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냉압연 강판량은 900만 US달러 수준에서 2억만달러 규모로, 내식강은 200만달러 수준에서 8000만달러 규모로 크게 늘었다. 최근 미 상무부는 중국산 제품의 ‘라벨 바꿔치기'에 대한 관리·감독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2018년 10월 애플 아이팟을 생산하는 고어택이 생산시설을 베트남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사진은 고어텍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에서 신제품을 소개하는 모습. 사진 =고어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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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공급망 재편 바람에 인도네시아 ’바탐’도 뜬다
싱가포르 가구회사 코다(Koda)는 일찌감치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 중 하나다. 이 회사가 1993년 베트남에 생산 시설을 마련할 즈음에는 비슷한 제조 공장이 많지 않았다. 이 회사 수석 총괄인 어니 코는 "베트남으로 들어오는 기업이 늘면서 이런저런 걱정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2년 사이에 항만이 번잡해지고 교통 체증도 날로 심해지고 있다면서 "이제 2주 전에 선박을 예약하지 않으면 물건을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토지·임금 상승, 항만·도로 체증 등으로 베트남의 제조 생산 능력이 벌써 포화상태에 달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베트남 땅값은 1㎡당 60미국 달러 수준에서 미·중 무역 전쟁 이후 1년 만에 100달러 수준으로 올랐다. 매년 1㎡ 5~10달러 수준으로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땅값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베트남 공장 이전을 관망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제조업체들이 베트남 땅값 상승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한 컨설팅업체에 따르면, 호치민의 인력난은 꽤 심한 편이다. 중국업체들이 선호하는 중국어 구사자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고,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인력을 데려와야 할 정도로 인력 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숙련자들이 경쟁업체로 이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중국 광둥의 인구는 1억430만명, 베트남의 인구는 9550만명이다. 광둥의 제조 인력은 2018년 기준으로 1271만명에 달하지만, 베트남 전역의 제조 인력은 2017년 기준으로 930만명이다. 베트남이 중국 광둥을 완전하게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이 베트남에 맞먹는 제조 허브가 되겠다며 각축전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베트남과 함께 바탐 자유 무역지대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진 =구글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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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자유무역 지대 ‘바탐(Batam)’이 대표적이다. 대만의 아이폰 제조업체 페가트론(Pegatron)은 중국산 제품에 대한 미국 관세를 피하려고 인도네시아 바탐으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다. 필립스는 이미 바탐에 면도기, 다리미 등 소형 가전 제품 생산 공장을 지었다.
싱가포르의 컨설팅 업체 AC 트레이드어드비저리의 알젤리아 츄는 "고객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으로 베트남과 함께 바탐이 꼽히고 있다"면서 "바탐은 싱가포르 등에 가까운 이점을 살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무역 지구가 됐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는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회원이기 때문에 자국이 호주, 캐나다, 일본, 멕시코 등과 거래하기에 최적의 지역이라고 홍보한다. CPTPP는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기존 통상환경을 대체할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래저래 미·중 무역전쟁이 글로벌 공급망의 전체 구조 변화를 촉발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중이다.
[류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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