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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20년 가정폭력 휘두른 남편 숨지게 한 주부에 집행유예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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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가정폭력을 당한 주부가 흉기를 휘둘러 남편을 숨지게 한 사건에 대해 법원이 이례적으로 피고인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시어머니마저도 선처를 호소할 정도로 가혹했던 가정폭력에서 비롯된 범죄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울산지법 형사11부(박주영 부장판사)는 21일 상해치사로 재판에 넘겨진 A(49)씨에 대해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판결문에는 A씨의 기구한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A씨는 27년 전에 남편과 결혼했다. A씨보다 네 살이 많은 남편은 직장생활을 했고, 두 사람 슬하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조선일보

문제는 술이었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술을 자주 마셨고, 과음한 날에는 가족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다. 2006년부터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두 차례 입원도 했지만 폭력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남편은 결국 술 문제로 3년 전 직장을 그만뒀고 이후 폭력적인 행동이 더 심해졌다.

시어머니 마저도 아들에게 "너의 술버릇이 가정·직장·자식들을 악마로 만드는 기막힌 행동이 계속되고 있으니, 인간으로 행하는 올바른 행동인지를 가슴 깊이 느끼고 정신을 좀 차려라. 애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지난 1월 30일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술에 취한 남편이 A씨가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흉기를 꺼내들었다. A씨는 동생의 집에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이를 만류하던 A씨가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식구들을 괴롭히냐"고 하자 남편은 "그러면 내가 죽겠다. 찌르라"고 했고, 흉기를 A씨에게 건넸다.

남편을 계속 밀어내던 A씨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흉기로 남편의 복부를 한 차례 찔렀다. 놀란 그는 119에 신고하고 지혈을 했지만, 병원에 실려간 남편은 끝내 숨졌다.

당초 경찰은 A씨를 살인 혐의로 송치했지만, 검찰은 살인의 고의가 없다고 보고 상해치사죄로 기소한 뒤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평소 술을 자주 마신 뒤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피고인(며느리)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참아냈고, 시댁 식구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두 자녀에게도 엄마가 꼭 필요하니 선처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수 차례 냈다.

재판부는 "가족의 간절한 희망에도 피해자의 주취폭력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세졌다"며 "피해자 유족이 선처를 탄원하고, 피고인이 구금 기간 내내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어 "피해자를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알코올 중독의 심각성에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고, 평범한 가정조차 개인의 음주 문제로 비극적 결과에 이른 데 대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가정폭력은 가족 구성원과 그들이 사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거나 세대 간 전이되는 등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참혹한 결과를 돌아보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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