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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먹고살 것 빼곤 다 돌려줘라”…안빈낙도와 베풂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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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현 스님 1주기 추모제 현장

법당엔 직접 깎은 불상 모셔두고

한때 한센병자들과 움집 생활도

술·담배도 마다않았던 괴각승

스스로 “중 되려다 못 된 중” 자처

파란고해 거치며 숱한 선시 남겨

설악산 신흥사 주지 맡은 이후

만해마을 설립해 문인 뒷바라지

약자에게 헌신한 이에겐 ‘만해상’

“여유 있으면 더 주고, 없으면 덜 주라”

“낙산사 불보다 마음의 불 걱정해라”

지인들, 무산이 남긴 말과 흔적 회고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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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승, 사하촌 주민, 문인들의 ‘우리 스님’

지난 16일 강원도 속초 설악산 신흥사에선 ‘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1932~2018)의 열반 1주기를 맞아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다례제가 봉행됐다. 다례제엔 신흥사 주지 우송 스님과 낙산사 주지 금곡 스님, 백담사 주지 삼조 스님 등 문도들과 오현 스님의 평생 도반인 회암사 회주 정휴 스님, 조계종 전계대화상 성우 스님과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참석했다. 또 이근배·신달자 시인,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 한분순 전 여성문학인회 회장 등 문인들과 정관계·법조계 인사 등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많은 외호객이 있었다. 오현 스님이 열반 직전까지 끔찍하게 도우며 챙긴 인제 용대리 주민을 비롯한 사하촌 사람들, 그리고 유랑하는 걸승들이었다. 큰 잔치나 상갓집을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동냥을 하던 탁발승에 대해 조계종은 종단 체면을 손상시킨다 하여 공식적으로 금해 이젠 탁발승을 대접해주는 절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탁발승들은 절집에서조차 욕을 먹고 쫓겨나기 일쑤다. 그런데 신흥사 주지 우송 스님은 행사를 다 마치고 유랑승들을 따로 모아 일일이 객비를 나눠주었다. 우송 스님은 “조실(오현) 스님께서 ‘여유가 있으면 좀 더 주고, 여유가 없으면 덜 주면 되지, 쪽박을 깨고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며 스승의 보시를 이어갔다. 지난해 다비식 현장에서 오현 스님의 무애적 삶을 나타내는 무애춤을 추었던 유랑승 무일 스님은 이날도 추모다례제가 열리기 전 오현 스님 영정 앞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진면목을 다 알 수 없는 안개산

15일엔 오현 스님이 설립해 동국대에 기증한 인제 만해마을에서 시인과 소설가, 평론가 등 문인과 승려 100여명이 모여 오현 스님 추모 세미나를 열었다. 오현 스님을 시봉한 김병무 만해마을 감사와 스님이 설립한 <불교평론>의 홍사성 주간이 스님을 잊지 못한 48명의 추억담을 모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펴냄)을 출간했고, 이를 기념하는 세미나를 연 것이다.

오현 스님은 다시 보기 어려울 만큼 기이하고 괴이한 괴각승이었다. 어려서 소머슴으로 절집에 맡겨졌던 그는 10대 때 절집을 나와 한센병자들을 따라 움집에서 사는 등 파란고해의 삶을 거쳤다. 근현대 대표적인 선시(禪詩)들을 남긴 그의 작품에 누구도 챙겨주지 않은 약자들과 아픈 자들, 짐승들, 미물들의 미묘한 슬픔과 아픔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신흥사 주지를 맡은 그는 만해마을을 설립해 궁핍한 문인들을 먹이고 재우고 뒷바라지하고, 국내외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만해상을 주어 보살행을 독려했다. 아무도 모르게 약자들을 지원한 사례는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낙승(落僧)이라고 했다. 30년 넘게 밥보다 술을 많이 먹고, 담배나 피우며 밥만 축냈으니 ‘중이 되려다 못 된 중’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절 받고 돈 받는 게 중 아니냐”고 했다. 또한 만해상 시상을 놓고도 “이만하면 만해를 팔아 장사를 잘했제”라며 담배 연기를 내뿜곤 했다. 그야말로 하룻밤 추위를 녹이려 절간의 보물인 부처님을 쪼개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넣고 있는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선사가 목불을 태우다)의 언행을 하면서도 천연덕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를 시봉한 김병무 만해마을 감사는 “큰스님들이 3배를 받는 것과 달리 1배만 하도록 한 뒤 자신도 상대와 맞절을 했고, 신도들 돈을 시주받는 것은 독사보다 무서운 것이니 먹고살 것만 빼고는 다 대중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오현 스님과 젊은 시절부터 교유했던 이근배 시인은 “천변만화하는 설악산을 어떻게 몇번 올라보고 다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오현 스님은 그의 호 무산(霧山) 그대로 범인들이 좀체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안개산이었다”고 회고했다. 지인들의 회고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조각의 퍼즐을 맞추어 안개에 싸인 설악산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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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할 땐 안빈낙도, 부유할 때 베풂

오현 스님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든지 눈치 보지 않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비난도 자초했지만,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 성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평생의 도반인 성우 스님은 30대 때 경북 청도 신둔사라는 절의 객실에서 강도를 만났는데, 턱밑에 칼을 들이대는데도 오현 스님은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고 배짱을 부려 강도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성우 스님은 이때 ‘이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갈 사람’임을 간파했다고 한다. 지난 2005년 천년고찰 낙산사가 화재로 전소되다시피 해 오현 스님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도 그의 배포는 달랐다. 당시 주지 정념 스님은 “어른 스님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이 크냐’고 위로하면 ‘낙산사 불난 것 걱정하지 말고 그대들 마음의 삼독의 불 끄지 못한 걸 걱정해라’고 말씀하곤 했다”고 전했다.

혹자는 스님이 가난한 문인들과 약자들을 지원한 것을 두고 절집 돈으로 인심을 쓴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신흥사보다 절 수입이 몇배나 되는 사찰들이 우리나라에 있지만 그 사찰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공적인 곳에 혹은 이름 없이 보살도를 행한 것을 보기 어렵다.

오현 스님은 20~30대 때 빈한하기 그지없는 경남 밀양 삼랑진 금무사 약수암에서 홀로 살았다. 그곳을 방문했던 정휴 스님에 따르면 법당엔 돈을 들여 산 불상이 아니라 자기가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을 모셔두고, 그 옆방 거처엔 <현대문학> 50여권을 쌓아놓고, 파랑새 담배 한 갑을 천장에 고무줄을 달아 늘어뜨려놓아 누워서 책을 보다가 고무줄을 잡아당겨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방안은 넉넉했고 조금도 어색하거나 가난에 쪼들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천진하고 소탈한 성품이 가난 속에서도 안빈낙도의 넉넉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심시조아카데미 홍성란 원장은 시 ‘춤’에서 오현 스님을 보낸 지인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얼마만한 축복이었을까/ 얼마만한 슬픔이었을까// 그대 창문 앞/ 그대 텅 빈 뜨락에//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사라지는/ 가랑잎/ 하나’

인제 속초/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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