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이정재의 시시각각] 노무현은 그때 이랬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가 부채는 지속가능성이 중요

GDP의 40%라야 위기에 대응

계엄 해서라도 방폐장 지어야”

중앙일보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늘이 고 노무현 10주기다. 다른 건 몰라도 경제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시각과 접근법은 지금 정부와 많이 달랐다. 당시 경제 장관들이 “그때는 이랬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잘 안 알려진 것 위주로 몇 장면을 정리했다. 망자에 관한 일화니 나쁜 것은 삼갔다.

#1. 2004년 6월 청와대 회의실. 노 전 대통령은 20여명의 은행장을 불러놓고 야단을 쳤다. 2003년 카드 사태로 신용불량자가 387만명까지 치솟았으니 그럴 만 했다.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렇게 돌아봤다. “대통령이 은행장을 불러 야단치는 건 직접 할 일이 아니라며 두 번이나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은행이 (돈벌이를 위해) 빌리기 쉽게 해놓으니 그런 것 아니냐’며 질타했다. 며칠이 지난 뒤 노 전 대통령이 속내를 털어놨다. ‘내가 경험한 금융위기가 두 번째입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건 세 번째 위기가 안 오느냐는 것입니다.’” 고 노무현은 ‘임기 중 경제 위기가 오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2. 2006년 8월 ‘국가비전 2030’ 발표. 권오규 당시 경제부총리의 설명은 이렇다. “비전 2030은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4만9000달러, 삶의 질 세계 10위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이다.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의 재정관이 담겨있다. 복지 수준을 크게 높이되 재정 건전성과의 균형을 추구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60%~40%를 국가 부채의 마지노선으로 봤다. GDP의 40%라야 위기가 닥쳤을 때도 대응이 가능한 수준, 60%는 지속은 가능하지만 위기 대응은 어려운 수준으로 봤다.” 고 노무현은 국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중시했다.

#3. 2005년 청와대 환율대책회의를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은 이렇게 기억한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팩스가 왔다. 대통령이 환율대책회의를 주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얘기가 미국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날 터였다. 경제관계현안회의로 이름을 바꾸라고 건의했다. 회의 날 대통령이 화를 벌컥 냈다. ‘대통령은 환율 몰라도 된다는 얘깁니까? 회의 이름까지 바꾸라고 하니 말이에요.’ 그러더니 나만 남고 다 나가라고 했다. ‘환율 개입하면 미국에 트집잡힌다’고 적극 설명했다. 한 나절 뒤 노 대통령이 전화했다. ‘당신 말이 맞다’고 했다.” 고 노무현은 환율이 크게 오르는 것을 걱정했다. 관료들과 끊임없이, 사심 없이 토론했다.

#4. K 장관의 회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 미국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쇠고기, 영화 스크린쿼터, 의약품. 노 전 대통령은 국내 이익집단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 장관 자리에 앉혔다. 농림부 장관 박흥수는 축협조합장 출신이었고, 문화부 장관 이창동은 스크린쿼터 반대 33인 중 일인이었으며,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고 노무현은 무역을 국가 균형 발전의 첫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5. 2003년 3월. 노 전 대통령이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을 불렀다. “왜 방사능폐기장 건립 문제가 해결 안 되느냐”고 다그쳤다. 윤 전 장관이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자 “계엄령 선포하고 군대를 보내서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원전 산업 발전에 방폐장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4년 뒤 월성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착공식에서 노 전 대통령은 “19년 만에 방폐장 부지 선정을 이뤄냈다. 정말 기쁘고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는 “세계가 원전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원전 건설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한국 원전은 세계 최고의 안전성을 갖고 있다”고 축사했다. 고 노무현은 친원전주의자였다.

영국 총리 처칠은 명언을 많이 남겼다. “과거와 현재를 싸우게 하면 우리는 미래를 잃게 될 것이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노무현 10주기를 맞아 되묻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정부는 100년 전 과거까지 꺼내 현재와 싸움 붙이고 있지 않은가. 경제는 심지어 노무현시즌1과도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