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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학생회장 선거 나왔나"… 美민주 주자들, 국제문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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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 20여명, 비판·대안 없어… 해리스 등 신진 세력도 입 닫아

배넌 같은 우파 전략가까지 "트럼프 아킬레스건 놓쳐" 비판

미국 트럼프 정부의 안보·통상 정책이 논란을 일으키는데도 제1 야당에서 이렇다 할 비판이나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대외정책을 언급하기 꺼리는 민주당의 '이상한 침묵'을 놓고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의 책사였던 스티브 배넌(65)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20일(현지 시각)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카멀라 해리스(54) 상원의원과 피트 부티제즈(37) 인디애나 사우스벤드 시장, 베토 오루크(46) 전 하원의원 등을 거명하며 "민주당의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주자들이 중국이나 이란, 베네수엘라에 대해 아무 말 않고 있다"며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것 같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세계는 점점 위험해지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1930년대식 고립주의를 고수한다. 미국이 고립된 섬이 되고 있다"며 "(이런 점을 용기 있게 지적하지 못하니) 야당 주자들이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다. 배넌은 극우 정치 운동가로 현재 트럼프와 거리를 둔 채 각국 주요 정당에 컨설팅을 하고 있다. 우파 전략가까지 '민주당 주자들이 타깃을 놓치고 있다'고 훈수를 둔 것이다.

조선일보

바이든, 워런, 부티제즈, 오루크,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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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지난해부터 민주당 경선에 출사표를 낸 주자 20여 명 중 제대로 된 대외 정책 구상을 내놓은 이는 아직 없다. 엘리자베스 워런(69)과 버니 샌더스(77) 상원의원이 '불평등 해소' 차원에서 "외국의 부패한 정권에도 맞서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원칙을 밝힌 정도다. 1위 주자인 조 바이든(76) 전 부통령도 지난 18일 "왜 트럼프는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폭군(tyrants)을 감싸느냐"는 한마디 논평을 한 데 그쳤다. 다른 주자도 "트럼프가 외교 정책을 트위터로 남발한다" "외교관 인사 공백이 크다"는 등 지엽적 문제를 지적하는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 폭탄'을 때려 미국 내 경제 부메랑이 가시화되면서 정부·여당에서도 비판이 나오지만, 이를 언급한 야당 정치인은 민주당 지도부와 대선 주자 중 카멀라 해리스 의원 한 명뿐이다. 그는 중국산 원료·부품 의존도가 높은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캘리포니아가 지역구다. 이 외에 기후변화 재해, 북핵, 중동 평화, 대테러전, 가난·질병 퇴치 같은 미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대외 정책에서도 트럼프가 계속 무리수를 두는데도 민주당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왜 민주당은 침묵할까. 통상 미국 대선에서 외교 정책은 경제·복지·의료 같은 국내 정책에 비해 큰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포린폴리시(FP)는 "내년 대선은 2016년 트럼프에게 뺏겼던 중서부(Midwest) 백인 노동자 표심이 최대 승부처가 될 것"이라며 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글로벌 외교·안보 이슈는 정치권에서 증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블루칼라에겐 "동맹들에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겠다" "미국을 약탈하는 불법 이민자와 중국 기업을 때려잡겠다"는 트럼프 외교 슬로건이 여전히 통한다.

더 큰 이유는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군사 불개입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미 진보 진영은 북한·이란·시리아·쿠바·베네수엘라 같은 적성국들과 군사 대결보다는 협상 우선주의를, 그리고 경제 정책에선 관세 부과로 자유무역에 장벽을 세우는 쪽에 서왔다. 그런데 이를 보수 포퓰리스트 대통령인 트럼프가 선점하면서 이념 전선(戰線)이 무너진 상태다. 또 좌파 엘리트들이 사회주의나 이슬람 반미(反美) 국가에 심정적으로 동조해 각 독재 정권의 인권유린을 지적하기를 꺼리면서, 독재자들에게 약한 트럼프 대통령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미 언론과 안보·통상 전문가, 보수·중도 진영에선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치 아래 벌인 각종 실험에 대한 비판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민주주의·인권·자유무역 등 자유 진영의 가치나 동맹을 무시해 적성국과 독재국에 잘못된 신호를 줬으며, 이것이 미국의 입지 약화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 미국진보센터의 유권자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외 정책에 대한 지지율은 40%로 모든 부문 중 가장 낮았다. '트럼프 정권 들어 미국이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엔 62%가 그렇지 않다고 했고, '최대 안보 위협'으로 꼽힌 북한(76%)과 러시아(57%)에 대한 정부 대응도 낮은 평가를 받았다.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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