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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르포]"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강원 산불 50일째, 대피소 냉바닥의 이재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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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불 50일, 집 잃은 이재민만 1305명
피해 복구 제자리걸음… 주택 재건은 막막
이달 말, 우선 조립주택에 340가구 입주 예정
이재민들 "불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

지난 22일 오전 강원도 속초시와 고성군 들판에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볏모가 빽빽하게 심어진 논에는 활기가 띠었고, 까맣게 그을린 산등성이에는 새파란 싹이 돋아 있었다. 전봇대에서 시작된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간 지 50일째 되는 날이다.

지난달 4일 산불이 시작됐던 고성군 토성면에 들어서니 불길이 남긴 상처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집들은 기둥과 외벽만 남았고, 삶터를 잃은 주민 28명은 아직도 마을 인근 임시대피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화재 당시 주민들 말처럼 꼭 폭격을 당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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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천진초에 마련된 임시대피소에서 장동욱씨가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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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물품 ‘生삼겹살’, 이재민들에겐 ‘그림의 떡’
이 마을 임시대피소인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 들어서니 라면박스를 줄세워 놓은 듯 가로ㆍ세로 2.5m에 높이 2m 짜리 네모난 텐트 15동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한 가족당 한동씩, 모두 28명이 지내고 있었다. 많았을 때는 텐트만 54동, 117명까지 이곳에 있었다. 주로 60대 이상 노인들이거나 인근 봉포마을이나 용촌마을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만 남았다. 대부분 친척집이나 시설좋은 곳을 찾아 떠났다.

지병선(62)씨 텐트에는 지씨 부부와 자녀 등 모두 네명이 한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지낸다. 바닥엔 은박 돗자리에 이불을 깔아 마루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는다. 살림살이라고는 옷가지 몇벌과 세면도구, 일회용 접시 등이 전부다.

51호 텐트 주민 왕주남(74)씨는 이날 피해 물품 목록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는 27일까지 고성군 화재 비상대책위원회에 피해 내용을 신청해야 한다고 했다. 장롱, 전기밥솥, 고추장 든 장독대… 타버린 살림살이를 적다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왕씨는 좁은 텐트 안에서 수시로 몸을 뒤척였다. 임시 텐트로 지내면서 허리가 안 좋아졌다. 왕씨뿐 아니라 이곳 이재민들 대부분이 팔과 다리에 파스를 달고 산다. 한 이재민은 "두 달 가까이 체육관 맨바닥에 이불 깔고 지내는데 몸이 남아나겠냐"며 "여러 사람과 같이 생활하다보니 잠도 깊이 못 잔다. 여긴 다 환자야"라고 말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이재민들끼리 종종 말다툼도 일어난다.

산불이 난 직후 공공기관들은 앞다퉈 연수원과 수련원 등을 내줬다. 그러나 시설 좋은 그곳으로 옮긴 사람은 차가 있거나 젊은 사람들. 인근 논밭에서 농사짓는 노인들은 대부분 텐트에 남았다. 한 이재민은 "젊은 사람이나 자가용 있는 사람 아니면 어떻게 그 먼곳에 가겠냐. 생업을 포기하고 옮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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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천진초에 마련된 임시대피소. 아직 이재민 28명이 이곳에 남아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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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농협에서 구호물품으로 돼지고기 한 근씩이 나왔다. 이재민들은 쓴 웃음만 지었다. 조리 시설은 커녕 후라이팬 하나 없는 이재민들 입장에선 돼지고기는 그저 ‘그림의 떡’이다. 왕씨는 "도와줘서 고맙기는 한데 다들 참 무심하다"며 "여기서 어떻게 요리를 해서 먹겠느냐"고 했다. 그리고는 "대피소에서 빨리 벗어나 ‘집 다운 집’으로 가는 게 유일한 바람"이라고 했다.

"피해 복구가 언제쯤 될지 갑갑해요. 대통령, 정치인들 오면 항상 하는 말이 ‘피해 복구 서두르겠다’ ‘돕겠다’고 하는데 그게 그분들 말처럼 빨리 되는 것도 아니고…"

52호 텐트 주민 장동욱(82)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거동이 불편해 텐트 밖에도 잘 나오지 못한다. 겨우 할 수 있는 게 체육관 가운데 놓인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다. 그는 버릇처럼 "어휴~ 갑갑해. 갑갑해" 하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장씨는 이달 초 문재인 대통령이 임시대피소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의 손을 붙잡고 "피해 복구가 빠르게 진행되면 좋겠다"고 호소했었다. 대통령도 당시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날 만난 장씨는 텐트 입구에서 고개만 내민 채 "기자양반, 언제쯤 될까. 다들 집에 가야할텐데. 복구가 그리 쉽게 되지는 않겠지요?" 하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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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5일 천진초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를 방문해 왕주남씨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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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까지 340가구 임시 조립주택에 입주
연수원, 수련원 등으로 옮긴 이재민들 형편은 그나마 나아보였다. 29가구 67명이 머물고 있는 속초시 농협보험 설악수련원. 한 가족당 66㎡(20평) 넓이의 콘도같은 방을 하나씩 쓰고 있었다. 이곳엔 간단한 조리시설이나 세면시설도 있었다.

하지만 이재민들 마음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수련원에 머무는 장천마을 주민 심수길(66)씨는 "주민 대부분이 농사꾼이라 일 끝내고 돌아오면 흙투성이가 된다"며 "연수원 사람들에게 우리가 행여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항상 눈치보게 된다"고 했다. 연수원 관계자는 "처음 며칠 동안은 이재민 분들이 연수원 구내식당에서 식사도 하셨는데, 관광객이나 직원들 눈치가 보이시는지 요즘엔 도통 오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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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난 22일 속초 장천마을 주민 심수길씨가 철거된 집 터를 바라보고 있다. (아래)50일 전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심씨의 집터.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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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씨가 살던 집은 몽땅 불에 타버렸다. 지금은 잿가루 쌓인 공터만 남았다. 불길을 피해 살아있었던 염소와 닭도 돌볼 형편이 못돼 모두 내다 팔았다. 심씨는 "17년 동안 머리 뉘여 자던 집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기분은 알기 어려울 것"이라며 "매일 집터를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한숨을 내쉬며 공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었다.

다행히 이달 말쯤엔 임시 조립 주택이 공터에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벌써 공터 한쪽에서는 기초공사를 위한 거푸집 작업이 한창이었다. 장천마을 통장 어두훈(61)씨는 "이달까지 마을에 총 24채의 임시 조립 주택에 들어설 예정"이라며 "연수원에 머물던 분들도 곧 마을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도에 따르면 현재 이재민은 총 1302명. 강원도 내 임시 대피시설 25곳에 흩어져있다. 이르면 이들도 6월이 오기 전에 보금자리를 찾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관계자는 "이번 주말부터 입주를 시작해 이달 말까지 340가구가 조립 주택에 입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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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장천마을에 설치된 임시 조립 주택 모습.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은 이곳에서 2년간 머물게 된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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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재건은 막막…"노인들이 무슨 수로 새집을 짓나"
제대로 된 피해 보상은 요원해 보인다. 지난 1일 정부가 산불 피해 종합복구계획을 발표하고 총 복구비를 1853억으로 확정했지만 인명 피해, 농임업·소상공인 피해 등에 대한 복구비가 245억 원에 불과하다. 나머지 1608억원은 산림·문화관광·군사시설 등 공공시설에 지원될 예정이다.

이재민들에게 임시로 제공되는 조립 주택도 2년 뒤엔 지자체에서 회수해 간다. 2년 안에 이재민들이 새집을 짓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전국재해구호협회 등에서 가구당 1000만~3000만원의 국민성금이 나왔다. 하지만 이재민들이 집을 마련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에서 주택 복구 비용으로 가구당 9000만원에서 1억5000만원까지 지원해주기로 약속했지만, 이중 30%는 저리(低利)로 빌리거나 개인이 부담하는 조건이다. 나머지 70%도 국민성금, 주거비, 지역 지원금을 포함한 금액이라 실질적으로는 얼마되지 않는다는 게 이재민들 주장이다. 피해 마을 주민들은 "일흔 먹은 농사꾼들이 빚을 져서 언제 갚을지도 막막하지만, 어디가서 누구한테 맡겨서 집을 지을지도 걱정"이라고 말한다.

"국민분들이 힘을 모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화재 이전처럼만 살고 싶다면 그건 욕심이겠지요?"라고 말하는 심씨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속초·고성=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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