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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싸고 가벼운 종이 집, 弱者들의 안식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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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커상' 받은 일본 건축가, 철심에 종이 감은 튜브 활용해 성당·UN 난민 센터 등 만들어

"종이는 물·불·지진에도 강하다"

조선일보

행동하는 종이 건축

반 시게루 지음|박재영 옮김|민음사|232쪽|1만3800원


1980년대 중반 일본 도쿄. 미국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온 20대 건축가가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 전시장 인테리어를 맡게 됐다. 자연 소재가 특징인 알바 알토의 감각을 살리고 싶었지만, 나무를 잔뜩 사용하기엔 예산이 부족했다. 고민에 빠진 그의 눈에 다른 전시에 사용했던 지관(紙管·종이 튜브)이 들어왔다. 재생지로 만들어 갈색을 띠는 데다 나무와 같은 따뜻함을 지녔다. '이거다!' 무릎을 친 건축가는 지관을 이용해 전시회장 벽, 천장, 전시대를 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튼튼했다. 어쩌면 건축 구조재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14년 프리츠커상을 받은 반 시게루(62)는 1987년 이래 줄곧 '종이 건축'을 트레이드 마크 삼아 작업해 왔다. '종이 건축'에 대한 철학을 담은 이 책에서 그는 말한다. "내 건축을 '친환경'이라 하는데 80년대 중·후반 일본은 버블 경제에 돌입해 '친환경' 같은 개념이 없었다. 다만 멀쩡한 지관을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재활용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건을 낭비하는 일이 '아깝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친환경'의 기본이 아닐까?"



조선일보

반 시게루 ‘종이 건축’의 대표작인 ‘종이 성당’(1995)의 첫 미사 풍경. 고베 대지진으로 불타 버린 다카토리성당 신자들을 위한 가설 건물이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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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게루의 '종이 건축'은 지관을 기둥이나 들보, 프레임 등의 구조재로 사용한다. 지관은 철심에 접착제를 바른 종이테이프를 나선 모양으로 감아서 만드는데, 두루마리 휴지 심이나 상장 보관통 등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종이는 진화한 나무입니다." 종이라는 여린 소재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설명한다. "일본 전통 지우산도 종이로 만들어졌다. 종이는 쉽게 방수할 수 있고, 벽지처럼 난연화(難燃化·불에 타기 어렵게 함)도 할 수 있는 첨단 소재다." "재료 자체의 강도와 그를 사용한 건축 자체의 강도 사이엔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말한다. 고베 대지진 때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무너졌지만 오히려 목조 주택에선 피해가 없었던 경우도 꽤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물 자체가 가벼우면 내진 면에서도 유리하다. 반 시게루가 강도 실험용으로 지은 자신의 별장 '종이의 집'은 1993년 일본 건축법 기준을 통과했다.

책에서 그는 프랑스 퐁피두 메츠센터 같은 자신의 거창한 대표작을 언급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세워졌다 곧 해체되는 가건물에 초점을 맞춘다. 재료비가 싸고 조립 및 해체가 쉬운 '종이 건축'은 '건축가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반 시게루의 오랜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1994년 르완다 인종 대학살 때 종이로 만든 난민 쉼터를 UN에 제안해 개발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불타 버린 나가타의 다카토리성당 자리에 지은 '종이 성당'은 건축가로서의 책임 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건물이다. 다카토리성당 신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베트남 난민을 위해 지은 이 건물은 80석 규모로, 가로 15m, 세로 10m 부지에 높이 5m, 지름 33㎝짜리 지관 58개를 세워 만들었다. 건축비는 기부금으로 충당했고,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 160명이 건설을 도왔다. 평일엔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센터로, 주말엔 성당으로 활용되다가 2005년 해체돼 큰 지진이 일어난 대만 푸리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 가건물이지만 영속성을 획득한 셈이다. 반 시게루는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가설(假設·임시 설치)'에 대해 생각했다. 콘크리트 건물도 지진이 일어나면 부서진다. 건물의 구조 재료보다 사람들이 건물에 애정을 느끼느냐에 따라 가설 혹은 영구적 설계가 결정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끄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어조는 무뚝뚝하며, 문장은 건조하고, 스토리텔링은 단편적이다. 그런데 감동적이다. 이런 부분에서다. "자원봉사에 임할 때 상대방한테 '해 준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상대방의 존엄을 무시한 자만심에 지나지 않는다. 자원봉사 활동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한다고 생각해야 자연스러워진다." 반 시게루는 1996년 NGO VAN(자원봉사 건축가 기구)을 설립했다.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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